【 복음 묵상 】5/29 연중 제8주간 목요일…양승국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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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29일 연중 제8주간 목요일-마르코 10장 46-52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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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많은 군중과 더불어 예리코를 떠나실 때에, 티매오의 아들 바르티매오라는 눈먼 거지가 길가에 앉아 있다가, 나자렛 사람 예수님이라는 소리를 듣고, “다윗의 자손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치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많은 이가 그에게 잠자코 있으라고 꾸짖었지만, 그는 더욱 큰소리로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쳤다. 예수님께서 걸음을 멈추시고, “그를 불러오너라.” 하셨다. 사람들이 그를 부르며, “용기를 내어 일어나게. 예수님께서 당신을 부르시네.” 하고 말하였다. 그는 겉옷을 벗어던지고 벌떡 일어나 예수님께 갔다. 예수님께서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주기를 바라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 눈먼 이가 “스승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주십시오.” 하였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고 이르시니, 그가 곧 다시 보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예수님을 따라 길을 나섰다. (마르 10,46ㄴ-52)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바르티매오라는 눈먼 거지, 그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의 삶을 살아왔습니다. 목숨이 붙어있었지만, 호흡은 계속되고 있었지만, 사실 죽은 목숨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너무나도 끔찍했던 여행길, 길고도 긴 고통의 터널을 지나느라 그의 영혼과 정신은 죽은 지 오래되었습니다.

그에게 제대로 된 사람 대접해주는 사람 한 명 없었습니다. 어디가나 천덕꾸러기요 애물단지였습니다. 사람들은 대놓고 그를 향해 손가락질했습니다. 평생에 걸친 그의 삶은 모욕과 멸시, 천대와 비아냥거림으로 가득했습니다.

이렇게 바르티매오는 존재하지만 존재를 부정당한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바르티매오를 예수님께서 부르십니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구걸을 위해 하루 온종일 길가에 앉아있어도 관심 가져주는 이가 단 한명도 없었는데, 기껏해야 동전 한 닢 깡통 속에 던져주는 것이 다였는데, 예수님께서 바르티매오를 가까이 부르십니다.

뿐만 아닙니다. 자상하게 이것 저 것 물어봐주십니다. 측은지심 가득한 음성으로 이름은 몇 가지를 물어보겠죠? 이름이 뭐냐? 언제부터 이렇게 됐냐? 사는 곳은 어디냐?

어쩌면 오늘은 바르티매오 인생에 있어 최고의 날입니다. 그에게 있어 시각장애, 그로 인한 굶주림은 큰 고통이었지만, 사실 더 큰 고통이 있었는데, 그것은 지독한 소외감이었습니다. 그는 항상 이방인이었습니다. 그 어디에도 끼지 못했습니다. 사람이 정말 그리웠습니다. 자신의 한탄을 들어줄 그 누군가가 정말 필요했습니다. 그런데 그 누구도 그런 역할을 해주지 않았습니다.

그런 바르티매오가 오늘 예수님으로부터 제대로 된 사람대접을 받은 것입니다. 정말 오랜만에 대화다운 대화까지 해 본 것입니다.

더욱 감지덕지한 일이 또 한 가지 생겼습니다. 예수님께서 인간대접해주고, 대화 나눠준 것만 해도 고마운 일인데, 바라는 바가 뭐냐고 또 물으십니다.

너무나 기뻤던 바르티매오는 지체 없이 소원을 아룁니다.

“스승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참으로 자상하신 예수님의 실체를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는 오늘 복음입니다. 단순한 병의 치유로 끝내지 않으십니다. 바르티매오 안에 내재되어있던 인간 본래의 존엄성, 가치를 함께 복원시켜주십니다.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는 선언을 통해서 예수님께서는 단순한 병의 치유를 훨씬 넘어 존재함으로 인해 겪게 되는 모든 속박으로부터의 해방을 선포하십니다. 육체의 해방뿐만 아니라 영혼의 해방을 선언하십니다. 일회적인 치유가 아니라 영속적 구원을 선포하십니다.

이제 바르티매오는 단순히 육체적 시력만 회복하게 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 안에 계신 하느님 아버지를 뵈올 수 있는 영적인 시력도 동시에 얻게 된 것입니다.

†살레시오회 수도원 수련원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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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복음 묵상

“스승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주십시오.”

하느님이 인간에게 눈을 세개 주셨음을 안지가 그리 오래지 않습니다.
사물을 보는 두 눈에 더하여,
'신앙의 눈'을 주셨습니다.

이제 두이레 된 강아지 눈만큼도 안 되게 뜬 신앙의 눈이지만
이 신앙의 눈으로 보면 모든 것이 경이롭습니다.
완전히 다른 세상입니다.

"스승님, 제가 신앙의 눈으로 세상을 다시 볼 수 있게 해주십시오."

*** 나의 삶의 자리에 접지하기 ***
오늘 하루를 모자람이 모자람이 아니라 넉넉함으로 느끼면서 살아갈 수 있도록 주님께로 주파수 고정...아멘.
안셀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