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복음 묵상 】6/4 연중 제9주간 수요일…양승국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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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4일 연중 제9주간 수요일 - 마르코 12,1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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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에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들이 예수님께 와서 물었다. “스승님, 모세는 ‘어떤 사람의 형제가 자식 없이 아내만 두고 죽으면, 그 사람이 죽은 이의 아내를 맞아들여 형제의 후사를 일으켜 주어야 한다.’고 저희를 위하여 기록해 놓았습니다. 그런데 일곱 형제가 있었습니다.
맏이가 아내를 맞아들였는데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그래서 둘째가 그 여자를 맞아들였지만 후사를 두지 못한 채 죽었고, 셋째도 그러하였습니다. 이렇게 일곱이 모두 후사를 남기지 못하였습니다. 맨 마지막으로 그 부인도 죽었습니다. 그러면 그들이 다시 살아나는 부활 때에 그 여자는 그들 가운데 누구의 아내가 되겠습니까? 일곱이 다 그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였으니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가 성경도 모르고 하느님의 능력도 모르니까 그렇게 잘못 생각하는 것이 아니냐? 사람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날 때에는,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이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아진다. 그리고 죽은 이들이 되살아난다는 사실에 관해서는, 모세의 책에 있는 떨기나무 대목에서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지 읽어보지 않았느냐? ‘나는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분께서는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너희는 크게 잘못 생각하는 것이다.” (마르 12,18-27)


<저물어가는 하루가 너무나 아쉽습니다.>

시시각각으로 꺼져만 가는 어린 생명의 끝을 붙잡고 통곡하는 한 어머니를 보았습니다. 거의 제정신이 아닌 어머니의 얼굴은 바라보기도 힘들 정도였습니다. ‘하느님도 무심하시지’라는 말이 절로 나왔습니다.

더 이상 해볼 도리가 없다고, 그쯤 했으면 할 도리 다 한 것이라고, 이제 그만 포기하라고 그렇게 타일러도 소용없습니다. 단 하루라도 더 붙들고 싶어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끝까지 기대의 끈을 놓지 않으십니다.

가만히 돌아보면 이 세상에는 안타까운 사연들이 어찌 그리도 많은지 모릅니다. 안타까움 중에 가장 큰 안타까움은 어린 생명이 꺼져가는 것이겠지요? 청춘의 나이에, 활활 타올라야할 절정기에 이 세상과 작별하는 일이겠지요.

사실 더 큰 안타까움이야 남아있는 분들의 몫입니다. 먼저 가신 분들보다 몇 백배 더 큰 허전함으로, 상실감으로 한 평생 가슴 시릴 분들도 많습니다. 밤마다 베갯머리를 눈물로 적시는 분들, 떠난 분들의 빈자리로 평생 마음이 허전할 분들, 화장실에 가서 수돗물 세게 틀어놓고 남몰래 통곡하는 분들도 많습니다.

예고도 없이 갑자기 우리 곁을 떠나가신 분들과의 인연을 돌이켜보며 떠난다는 것은 무엇이며, 남아있다는 것은 또 무엇인가 생각해봅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생과 사, 남음과 떠남은 종이 한 장 차이입니다. 사실 우리 역시 언제까지 남아있을지 전혀 예측 못할 일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하루하루 살얼음판위를 걷고 있습니다. 이승과 저승 그 사이에 난 가파른 골짜기를 아슬아슬하게 걷고 있습니다.

결국 먼저 떠난 분들, 다 하느님께서 계획이 있으셨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남아있는 우리에게도 뭔가 하느님의 계획이 있을 것입니다.

남아 있는 우리에게 정녕 중요한 일이 무엇일까요? 사별의 충격에 늘 애통해하면서, 늘 가슴아파하면서, 늘 괴로워하면서 한평생 살아갈 것을 하느님도, 먼저 떠나신 분들도 절대 원치 않을 것입니다.

먼저 떠난 분들의 안타까움, 아쉬움, 섭섭함, 허전함을 우리의 사랑으로 채워나가는 것, 그것이 남아있는 우리에게 주어진 가장 큰 과제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떠난 분들이 못다 이룬 사랑을 우리가 대신 실천하는 일. 그분들이 못다 이룬 꿈을 우리가 대신 실현시키는 일, 그분들이 채 못 누린 행복을 우리가 대신 누리는 일,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망자(亡者)를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일 것입니다.

하루가 죽음처럼 고달플지라도 절대로 힘들다고 불평하지 마십시오. 세상살이가 너무 힘겹다고, 사는 것이 너무 지루하다고 투덜대지도 마십시오.

이 세상에는 단 하루의 삶이라도 연장시키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다하고 있는 분들도 부지기수이기 때문입니다. 단 1%의 가능성 앞에서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기적을 갈구하고 있는 분들이 수두룩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가 습관적으로 맞이하는 아침, 보통 아침이 아닙니다. 너무나 소중한 황금 같은 아침입니다. 별 것 아닌 것처럼 생각하실지 모르겠지만 아직 우리가 이 땅에 두발을 딛고 서 있다는 것, 사실 축복 중의 축복이며, 눈물겨운 환희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하루는 가장 큰 선물이며 가장 감동적인 사건입니다.

우리가 이아침, 지저귀는 새소리와 함께 다시금 눈떴다는 것, 커튼을 젖힐 수 있다는 것, 창문을 활짝 열수 있다는 것, 참으로 크신 주님 은총의 결과입니다.

오늘 복음 말미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분께서는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먼저 떠난 분들은 이제 자비로운 하느님 손에 맡겨졌습니다. 그분의 따뜻한 품 안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리고 계실 것입니다. 더 이상 울며 애통해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직 하느님 자비에 맡겨드리는 일, 끊임없이 하느님 자비를 청하는 일만 남았습니다.

이제 시선을 우리의 오늘에 돌려야 할 때입니다. 하느님은 바로 살아있는 우리의 하느님이십니다. 오늘 이 땅 위에서 살아 숨 쉬는 우리, 아직 부족하기에 죄도 짓고 방황도 하는 우리, 그러나 아직 살아있기에, 다시 말해서 주님 은총의 손길 안에 있기에, 감사하며, 기뻐하며, 행복해하며 그렇게 살 일입니다.

저물어가는 하루가 너무나 아쉽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조금이라도 더 많이 전해야 했었는데, 너무나 안타깝습니다. 주님의 사랑을 좀 더 실천했어야 했는데, 좀 더 행복하게 살아야 했었는데...

†살레시오회 수도원 수련원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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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아멘!

네~~알겠습니다.
아버지 안에서는 모두 하나겠지요!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하신 말씀...
가슴에 새기고 열심히 말씀 전하며 기쁘게 살겠습니다.
행복한 예수 성심 성월 되세요.

나의 복음 묵상

"그분께서는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이 세상 모든 생명체에 하느님의 손길이 닿아 있지 않을까요?
뿐만아니라, 이 생명체를 둘러싼 모든 것들에도 하느님의 손길이 닿아 있지 않을까요?
살아 있다는 이 자체가 은총임에 틀림 없습니다.
살아 숨쉬는 지금을 열심히 그리고 기쁜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이 하느님 은총에 대한 응답이 아닐까요?
우리의 생명이 귀중한 것처럼 다른 생명도 귀중하게 여기며 살아가는 것이 하느님 은총에 대한 응답이 아닐까요?

*** 나의 삶의 자리에 접지하기 ***
오늘 새벽 일어나 또 새로운 하루를 주심에 감사드렸던 그 마음을
오늘이 끝나는 그때까지 가져갈 수 있기를...
안셀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