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복음 묵상 】8/31 연중 제22주일…양승국 신부님
8월 31일 연중 제22주일 - 마태오 16,21~27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반드시 예루살렘에 가시어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흗날에 되살아나셔야 한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밝히기 시작하셨다. 그러자 베드로가 예수님을 꼭 붙들고 반박하기 시작하였다. “맙소사, 주님! 그런 일은 주님께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사람이 제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느냐? 사람의 아들이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천사들과 함께 올 터인데, 그때에 그 행실대로 갚을 것이다.” (마태 16,21-27)
<십자가가 은총임을 깨닫는 순간>
며칠 전에 한 아이가 저를 찾아왔습니다. 아직 '새파란' 나이임에도 꾸부정한 어깨에 잔뜩 주눅이 들고 '삭은' 얼굴을 보니 산전수전 다 겪은 듯했습니다. 알고 보니 아이는 이미 두 번이나 '가지 말아야 할 곳'을 다녀왔습니다. 그곳을 나온 후 '더 이상 방황은 없다'며 굳은 각오를 세웠지만, 와 닿는 현실이 만만치 않았습니다. 사람들 시선도 곱지 않았습니다. 취직하는 곳마다 뭔가 꼬여서 월급도 제대로 못 받고 쫓겨나오기를 밥 먹듯이 반복했답니다. 아이의 그런 모습 앞에 저는 너무도 안타까워 할 말을 잃었습니다.
앞길이 구만리 같은 녀석이 왜 이렇게 힘이 없냐고 가슴 딱 펴고 힘내라고 잘 될 거라며 어깨를 두드려줬지만, 아이는 피식 웃기만 했습니다. 덩치는 산만한 녀석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겨우 이렇게 말해서 또 충격을 받았습니다.
"사는 게 너무 힘들어요. 이 세상 어딜 가도 절 받아주는 데가 없어요. 다시 '그곳'으로 들어가는 게 오히려 편할 것 같아요."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일자리든, 있을 만한 곳이든 조만간 알아봐주겠노라고 타일러 겨우 집으로 돌려보냈습니다.
그 아이가 지고 가는 십자가가 너무나 커보였습니다. 어떻게 하면 조금이라도 아이가 지고 있는 십자가 무게를 덜어줄 수 있겠는지, 며칠을 두고 고민했습니다.
이 한세상 살아가면서 우리는 다양한 삶의 십자가와 그 십자가에 수반되는 좌절, 고독과 직면하게 됩니다. 난데없이 다가온 병고, 실직, 가정파탄, 우울증, 신경과민, 거듭되는 실패…. 그 끝도 없는 어둠의 터널을 지나가는 사람들은 누구나 이런 의문 앞에 서게 되겠지요.
'진정 하느님이 계시긴 하는 걸까? 하느님께서는 사랑과 자비의 하느님이시라는데, 어찌 이렇게도 철저하게 나를 망가트릴 수가 있겠는가? 하느님께서는 어찌 이리도 큰 십자가를 내게 보내시는가?'
때로 너무나 감당하기 힘든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하느님도 무심하시지'라는 탄식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 이렇게 십자가는 난데없이, 그리고 쉼 없이 다가오는 것입니까? 피할 방도는 없습니까? 어떻게 십자가를 이해해야 합니까?
한평생 십자가를 예방하면서 살얼음 위를 걷듯이 조심조심 살아갈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그 누구도 무작정 십자가를 피해 다닐 수만은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주어진 중요한 과제 중 하나가 '십자가에 대한 적극적 수용' '십자가의 가치 인정' '십자가에 대한 의미 부여'입니다. 결국 십자가 앞에 대범해지는 길입니다. 십자가에 지나치게 연연해하지 말고 십자가를 친구처럼 여기는 것입니다. 십자가 가운데서도 행복하게 살아가는 방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고맙게도 우리가 매일 걷는 십자가 길에서도 마음의 평화를 유지할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주시는 분이 계십니다. 그분은 바로 '십자가의 인간' 예수님이십니다. 결국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 우리가 지고 가는 매일의 십자가에 대한 이해와 수용, 의미 부여가 가능합니다.
번민과 고통의 십자가가 엄습해오는 순간은 하느님을 만날 준비를 하는 순간으로 생각하십시오. 치욕의 십자가가 다가오는 순간은 하느님과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은총의 순간임을 기억하십시오.
살아가다 보면 언젠가 이런 날과 마주치겠지요. 수많은 지난 것들이 한꺼번에 몰려와 가슴 치게 되는 날이. 그 혹독했던 고통이야말로 그분 사랑의 또 다른 표현이었음을 깨닫는 순간. 날카로운 비수 같아서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던 그때 말 한마디야말로 가장 효과가 탁월한 내 인생의 보약이었음을 알아차리는 순간. 어떻게 해서든 벗어나고 싶었던 그 지루했던 일상의 굴레들이 행복의 원천이요 도구였음을 알아차리는 순간. 시시해 보이는 순간순간이 꽃봉오리였음을 깨닫는 순간. 결국 십자가는 은총이라는 진리를 깨닫는 순간 말입니다.
그런 순간이 조금이라도 빨리 다가온다면 얼마나 행복한 일이겠습니까? 그 순간은 우리 삶과 신앙이 크게 한 단계 비약하는 순간입니다. 그 순간은 정녕 깨달음의 순간이요, 일생일대의 가장 중요한 순간이 될 것입니다.
†살레시오회 수도원 수련원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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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나의 복음 묵상
"제 십자가를 지고..."
어제 저녁 정말 오래 묵은 친구이자 대자 집에 가서 저녁을 함께 했습니다.
5년전 명예 퇴직으로 평생을 한 우물만 팠던 직장에서 밀려나 몸고생, 맘고생 무지하면서 지내고 있는데...
"주님의 사랑은 주식이고, 고통은 반찬이다."
오랜 고통의 삶의 반추에서 나온 이 한마디가 방금 다녀온 새벽 미사를 모시는 내내 제 머리 속에 맴돌았습니다.
이제 길을 나서면, 이 친구와 한께 또 다른 오랜 친구와 천마산을 오를 겁니다.
척추가 굳어 가는 원인도 모르고 치료법도 없는 병에 걸려 이미 목뼈까지 굳어 온 몸을 돌려야 옆을 볼 수 있는 친구입니다.
그런데 이 친구가 서너 시간 걸리는 산행을 합니다.
그러면서 사는 모습은 천사와 같습니다.
제가 감히 성당 가자고 운을 띄지를 못합니다.
그 놈의 삶 속에서 하느님의 천사를 이미 보고 있기 때문이지요.
*** 나의 삶의 자리에 접지하기 ***
나는 얼마나 주어진 고통을 받아들이고 있는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아야 겠습니다.
안셀모
실로,
요즈음
내 생활의 리듬이
잠시 깨어져 힘들어 하고,
투정을 부려 보곤 하던 제 자신이
부끄럼을 느끼게 합니다.
모든것을 감사 하라는 말을 다시 생각 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