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복음 묵상 】9/18 연중 제24주간 목요일…양승국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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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18일 연중 제24주간 목요일-루카 7장 36-50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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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에 바리사이 가운데 어떤 이가 자기와 함께 음식을 먹자고 예수님을 초청하였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그 바리사이의 집에 들어가시어 식탁에 앉으셨다. 그 고을에 죄인인 여자가 하나 있었는데, 예수님께서 바리사이의 집에서 음식을 잡수시고 계시다는 것을 알고 왔다. 그 여자는 향유가 든 옥합을 들고서 예수님 뒤쪽 발치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분의 발을 적시기 시작하더니 자기의 머리카락으로 닦고 나서, 그 발에 입을 맞추고 향유를 부어 발랐다. 예수님을 초대한 바리사이가 그것을 보고, ‘저 사람이 예언자라면, 자기에게 손을 대는 여자가 누구이며 어떤 사람인지, 곧 죄인인 줄 알 터인데.’ 하고 속으로 말하였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시몬아, 너에게 할 말이 있다.” 시몬이 “스승님, 말씀하십시오.” 하였다. “어떤 채권자에게 채무자가 둘 있었다. 한 사람은 오백 데나리온을 빚지고 다른 사람은 오십 데나리온을 빚졌다. 둘 다 갚을 길이 없으므로 채권자는 그들에게 빚을 탕감해 주었다. 그러면 그들 가운데 누가 그 채권자를 더 사랑하겠느냐?” 시몬이 “더 많이 탕감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옳게 판단하였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그 여자를 돌아보시며 시몬에게 이르셨다. “이 여자를 보아라. 내가 네 집에 들어왔을 때 너는 나에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않았다. 그러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자기의 머리카락으로 닦아주었다. 너는 나에게 입을 맞추지 않았지만, 이 여자는 내가 들어왔을 때부터 줄곧 내 발에 입을 맞추었다. 너는 내 머리에 기름을 부어 발라주지 않았다. 그러나 이 여자는 내 발에 향유를 부어 발라주었다. 그러므로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이 여자는 그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 그래서 큰 사랑을 드러낸 것이다. 그러나 적게 용서받은 사람은 적게 사랑한다.” 그러고 나서 예수님께서는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그러자 식탁에 함께 앉아 있던 이들이 속으로, ‘저 사람이 누구이기에 죄까지 용서해 주는가?’ 하고 말하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여자에게 이르셨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 (루카 7,36-50)


<상처 입은 영혼들이여, 힘을 내십시오!>

오늘 복음은 하느님께서 죄인인 우리에게 어떻게 위로를 건네시는가,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복음 내용, 여러분들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한 바리사이가 주관한 저녁식사에 초대를 받아가셨는데, 거리에 한 행실 나쁜 여인이 나타납니다. 예수님 발치에 서서 눈물을 흘리고 머리카락으로 예수님의 발을 닦아드리고, 옥합을 깨트려 향유를 부어드린 특별한 사건입니다.

루카 복음사가는 개인 프라이버시를 존중하는 차원에서 이 여인의 실명을 제시하지 않고 있는데, 루가의 표현에 따르면 ‘죄인인 여자’였습니다.

그렇다면 이 여인은 그간 살아오면서 셀 수도 없이 많은 죄를 지어온 여인, 밥 먹듯이 죄를 지은 여인, 죄 속에서 살아온 여인, 시편작가 표현에 따르면 머리칼보다 많은 죄로 괴로워하고 있던 여인이었습니다. 죄에서 한번 벗어나보려고 몸부림도 많이 쳐봤지만, 결국 다시 죄로 빠져들던 그런 여인이었습니다.

이런 여인이 한 바리사이가 주관한 저녁식사 자리에서 예수님과의 운명적인 만남을 갖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다시피 예수님께서는 격식이나 체면과는 거리가 먼 분이셨습니다. 오랜만에 만나게 된 산해진미 앞에 예수님과 제자들은 신바람이 났겠지요. 이게 웬 떡이냐, 며 정신없이 음식을 드시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지금 수도자가 되기 위해 1년간 집중적인 교육을 받는 수련자 형제들과 살면서 그런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들 앞으로 서원을 하고, 서품을 받으면 평생 아쉬운 것 없이, 불편한 것 없이, 그렇게 지낼 텐데, 수련기간 때만이라도 제대로 한번 가난하게 살도록 도와주자.

그래서 세운 몇 가지 원칙이 있습니다. 물건을 사는 문제에 있어서는 이렇습니다. 수련기간 동안은 그 어떤 물건이라 할지라도 새로 사지 않는다. 한 형제가 질문합니다. “신부님, 그럼 운동화가 다 떨어지면 어떡합니까?” “그럴 땐 기워 신는다.” 또 묻습니다. “깁고 또 기워 너덜너덜 해지고 더 이상 방법이 없는데요.” “그럼 빌려 신는다.”

음식과 관련해서는 이렇습니다. 첫째 수련소 사전에 일체 외식은 없다. 둘째 그러나 만의 하나 천재지변이 일어나서 외식을 해야 할 경우, 가격은 상한치 3천원을 넘지 않는다. 세 번째 혹시라도 다른 공동체나 잔치에 초대받아갈 때는 주린 배를 채울 수 있는 절호의 찬스이기에 최대한 먹어둔다.

공생활을 시작하신 예수님과 제자들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은 어찌 보면 노숙인들이었습니다. 한곳에 정착하지 않으셨습니다. 계속 이집 저집 거처를 옮겨 다니시면서 챙겨주면 먹고, 그렇지 못하면 쫄쫄 굶기도 하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번에 기회가 온 것입니다. 예수님을 초대한 바리사이는 꽤 부자였습니다. 한 상 거나하게 잘 차렸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이런 기회를 최대한 활용하자며 열심히 영양보충에 전념하셨습니다.

이때 한 ‘껄끄러운 존재’가 등장했습니다. 그 껄끄러운 존재는 다름 아닌 ‘죄인인 여인’이었습니다. ‘행실이 양호하지 않은’ 여인이었습니다. 아마도 ‘자영업’ 여인이었던가 봅니다. 상황을 봤을 때, 그 여인이 길거리에 나서면 사람들은 다들 그녀를 알아봤습니다. 그리고 손가락질 했습니다.

그런 여인이 만찬석상에 등장한 것만 해도 부담스런 일이었는데, 그 여인이 하는 행동 좀 보십시오. 정말 가관이었습니다.

식사 중이시던 예수님의 뒤쪽 발치에 서서 대뜸 울기 시작합니다. 그냥 우는 것이 아니라 대성통곡을 터트렸습니다. 얼마나 서럽게 울었던지 흘러내리는 눈물의 양이 만만치 않았습니다. 그 눈물은 예수님의 발을 적셨습니다.

전라도 표현에 따르면 눈물을 찌끄렸습니다. 만찬 파티에서 대성통곡을 터트리고 있는 여인, 참 안 어울리는 장면이지요.

뿐만 아니었습니다. 여인의 자신의 긴 머리카락을 이용해서 예수님의 발을 닦았습니다. 더 괴로운 일은 예수님의 발에 입을 맞추었습니다. 마무리로 향유까지 발에 부었습니다.

예수님 입장에서 보았을 때 참으로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만일 제가 예수님 입장이었더라면, 여인을 향해 크게 호통을 쳤을 것입니다.

“야, 이 *야, 넌 왜 하필 밥상머리에서 이 난리냐? 밥 먹을 때는 개도 안 건드린다는데, 밥 좀 먹게 놔두면 덧나냐? 그리고 왜 찝찝하게 남의 발에 눈물을 찌끄리냐? 남사스럽게 남의 발에 입은 왜 맞추는 거야? 당장 그만 안 둬? 너 한번 디져 볼래?”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여인을 조금도 몰아세우지 않으십니다. 그저 묵묵히 여인의 행동을 바라보십니다. 여인의 눈물에 담긴 지난 세월의 상처와 아픔에 깊은 연민의 정을 느낍니다. 여인의 회개하는 마음을 조용히 받아주십니다. 이윽고 여인에게 다가가십니다. 여인의 죄를 말끔히 씻어주십니다. 여인의 손을 잡고 여인을 죽음에서 생명으로 끌어올리십니다. 여인에게 새 삶을 부여하십니다.

예수님의 달콤한 사랑은 갈 데 까지 간 여인의 마음을 녹이셨습니다. 예수님의 따뜻한 위로는 지난 세월 여인이 받아왔던 갖은 상처를 순식간에 치유시켜주셨습니다. 예수님의 부드러운 손길은 여인 내면에 깃들어 있던 인간 본래의 존엄성과 고귀한 가치를 다시금 복원시켜주셨습니다.

위로자 하느님께서는 그 옛날 죄 많은 여인에게 보여주셨던 그 모습 그대로 오늘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상처입고 방황하는 우리들을 향해 오늘 똑같은 모습으로 다가오십니다. 우리의 상처를 싸매주십니다. 새살을 돋게 하십니다.

여러분들, 여러분들의 지난 잘못이나 죄, 상처, 악습, 방황으로 괴로울 때가 있을 것입니다. 고백성사 통해서 다 죄가 사해졌지만, 또 말끔히 잊었다고 생각했지만 불시에 그 아픈 기억들이 되살아나서 괴롭습니다.

그럴 때 마다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 세상에 상처 없이 살아가는 사람은 단 한명도 없습니다. 이 세상에 죄 하나도 없이 살아가는 사람은 단 한명도 없습니다.

죄인인 여인이 새 삶을 복원시키는 모습을 기억하면서 오늘 우리 역시 지난 시절의 심각한 죄로 인해 고통당할 때 마다 우리 자신에게, 또 이웃들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상처 입은 영혼들이여, 힘을 내십시오. 영원한 좌절은 없습니다. 영원한 눈물도 없습니다. 끝도 없는 슬픔이란 더욱 더 없습니다.

오늘 우리의 앞길이 아무리 캄캄하다 하더라도 언젠가 저 멀리 어둠 속에서 내 손 마주 잡을 위로의 큰 손 하나 반드시 오고야 말 것입니다.

인간의 끝은 하느님 측의 시작입니다. 인간의 절망은 하느님 편의 희망입니다. 인간의 좌절은 하느님 측의 기회입니다.

우리가 지칠 때 가까이 오시는 분, 우리가 아주 지쳐서 탄식할 때 더욱 가까이 다가오시는 분, 견디다 울며 쓰러질 때 우리를 받아 안아주시는 분, 그분이 바로 우리의 하느님이십니다.
†살레시오회 수도원 수련원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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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나의 복음 묵상

"내가 네 집에 들어왔을 때 너는 나에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않았다."

예수님을 초대하긴 했지만 존경심을 가지고 대접을 하고자 초대한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뭔가 건수를 잡을려는 의도가 있지 않았을까 짐작됩니다.
예수님도 이런 낌새를 이미 간파하셨겠지요.
제자들 보기에도 민망한 그런 자리가 아니었을까요?

저 같으면 이런 낌새를 알아채는 순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납니다.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왜 그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지 않고 그 자리를 자켰을까 묵상해 봅니다.

*** 나의 삶의 자리에 접지하기 ***
부당한 대접에 화내기 보다는 그 속에 담긴 뜻을 바라보기...
안셀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