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복음 묵상 】10/7 화요일 묵주 기도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양승국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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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7일 화요일 묵주 기도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 -루카 10,3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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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에 예수님께서 어떤 마을에 들어가셨다. 그러자 마르타라는 여자가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모셔 들였다. 마르타에게는 마리아라는 동생이 있었는데, 마리아는 주님의 발치에 앉아 그분의 말씀을 듣고 있었다. 그러나 마르타는 갖가지 시중드는 일로 분주하였다. 그래서 예수님께 다가가, “주님, 제 동생이 저 혼자 시중들게 내버려 두는데도 보고만 계십니까? 저를 도우라고 동생에게 일러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주님께서 마르타에게 대답하셨다.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루카 10,38-42)


<특별한 여인, 마르타>

복음서에 등장하는 여러 인물들, 다들 특별한데, 그 중에서도 아주 특별한 인물이 한 사람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마르타입니다.

마르타는 죽었다 살아난 라자로의 누이동생이며, 마리아의 언니입니다(요한 11장 1절). 예수님께서는 이 가족 구성원들과 각별한 우정관계를 맺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공생활 기간 배고플 때 가끔씩 그들의 집에 들르시곤 하였는데, 그들도 예수님을 흠모하며 따랐습니다.

마르타가 예수님을 향해 보여준 언행은 눈여겨볼만 합니다. 오빠 라자로가 중병에 걸렸을 때, 제발 좀 살려달라고 청했지만, 예수님께서는 늑장을 부리셨지요. 결국 오빠가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장례식까지 다 치루고 난 뒤 나타나신 예수님을 향한 마르타의 질책은 아주 매섭습니다.

“주님,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요한복음사가는 마르타의 비난을 아주 고상하게 기록하고 있지만, 당시 실제상황은 훨씬 신랄했을 것입니다. 마르타의 급한 성격을 참작했을 때 충분히 그러고도 남았을 것입니다.

“이제 나타나서 뭘 어쩌겠다는 거예요? 오빠 친구가 되가지고, 이래도 되는 겁니까? 다른 사람들 다 살리면서, 그래 그렇게 절친했던 우리 오빠를 그냥 죽게 놔둬요? 그동안 아귀 같은 일행들 식사 대접한다고 뼈 빠지게 일했는데, 이래도 되는 거예요?”

오늘 복음에서도 마르타는 동생 마리아 때문에 심기가 많이 불편했습니다. 다녀간 지가 몇 일 안됐는데, 또 다시 예수님과 제자 일행이 나타났습니다. 마르타는 아침부터 정신없이 바빴습니다. 한 두 명도 아니고 수십 명입니다.

시간이 흘러 이제 막 식사를 대령해야할 순간이었습니다. 손이 열 개라도 부족한 순간, 동생 마리아 생각이 났습니다. 아무리 찾아도 없었습니다. 나중에야 예수님과 단둘이 마주 앉아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마르타는 소매를 단단히 걷어붙이고 예수님께 따집니다.

“주님, 이거 너무 불공평한 것 아닙니까? 저는 아침부터 쌔빠지게 고생하고 있는데, 재는 도대체 뭡니까? 이래도 되는 겁니까?”

마리아를 보고는 아마 이랬을 것입니다.

“이, 여시 같은 *, 너 여기서 도대체 뭐하고 있어? 좋은 말 할 때 당장 부엌으로 안 나와?”

예수님을 향해 겁도 없이 질책을 서슴지 않는 여인 마르타, 그만큼 그녀는 예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습니다. 가족 같은 관계, 오빠 동생 같은 관계였습니다.

예수님을 향해 마음껏 분노를 표출할 줄 아는 마르타를 보면서 생각해봅니다. 우리는 우리의 하느님을 너무나 큰 대상, 그래서 감히 범접하기 힘든 대상으로 설정하고 있지는 않은지요?

싫을 때는 있는 그대로 싫다고 소리칠 줄 아는 마르타, 힘들 때면 힘들다고 솔직하게 그분께 털어놓을 수 용기를 지닌 마르타였습니다. 그만큼 그녀는 예수님과 절친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친한 오빠에게 하듯이 졸라대기도 많이 했습니다. 예수님을 각별히 신뢰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런 마르타에게 한 걸음 더 나아갈 것을 요청하십니다. 성실한 봉사활동도 좋지만 영성생활, 하느님과의 인격적인 만남, 그를 통한 영혼의 구원도 소홀히 하지 말 것을 부탁하십니다.

“필요한 것은 한 가지 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택했다.”

교회를 위해, 주님을 위해 열렬한 봉사활동도 좋지만 그 봉사의 목적, 정신을 먼저 생각해보라는 말씀입니다. 눈앞의 일도 중요하겠지만, 더 멀리 내다보라는 말씀입니다. 결국 보다 궁극적인 일, 영혼을 위한 일에 더 우선적 투자를 하라는 말씀입니다.

제2차적인 일, 주변적인 일, 부수적인 일, 그리 신경 쓰지 않아도 될 일에 기를 쓰고 몰두하느라 가지고 있는 모든 에너지를 소모시키는 우리들입니다. 그러다보니 가장 신경 써야 할 중요한 일, 정말 좋은 몫인 하느님, 영적생활은 뒷전이 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활동지상주의는 신앙인으로서 경계해야할 대상입니다. 봉사활동에 앞서 짧게나마 기도로 시작하려는 노력, 봉사활동이 끝나는 동시에 주모경이라도 한번 바치는 모습이 필요합니다. 기도와 묵상이라는 토대 위에, 하느님과의 인격적 만남이라는 배경 위에 봉사활동이 이루어져야 그게 바람직한 것입니다.

†살레시오회 수도원 수련원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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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나의 복음 묵상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요즈음도 가끔 정신 없이 몰아치며 살아가던 그때가 다시 떠오를 때가 있습니다.
너무나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면서 정말 숨가쁘게 살았습니다.
그렇게 해야만 가족을 부양할 수 있다는 일념에 뒤돌아 볼 겨렬이 없었습니다.

어느 순간 밤시 멈추고 뒤를 돌아 보았을 때 남은 건,
황량하고 메말라 갈라진 내 가슴과
가까이 하기에는 너무나 멀어진 가족들과의 관계였습니다.

그 후 아직까지 진행되고 있는 저의 제자리로 돌리기 여정,
주 예수님과의 만남과 그 뒤를 이은 기도에로의 초대가 없었더라면 ... ...

일과 기도와의 발란스 맞추기,
이것이 문제인 듯합니다.

*** 나의 삶의 자리에 접지하기 ***
지금의 모든 것에 대하여 주님께 감사...
안셀모

동행자..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늘 주변에 친구를 찾게되나 봅니다.
일요일 성당을 갈때도 함께 갈 벗이 있거나 미사후 환담을 나눌 동행자가 있다면,
나도 모르게 즐거움이 생깁니다.

그러나 아는 사람도 없고, 말걸기도 쑥스럽다면,
그만큼 즐거움이 감소될 것입니다.
그럴수록 외로운 교우님들의 벗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이 문득듭니다.

간혹
봉사활동을 세게 열심히 하다보면,
다른 사람들의 활동이 상대적으로 미지근하게 보이고,
자연스레 인간적인 원망이 생깁니다.

그런 원망들은 나의 신앙을 깍아먹는 요인이 되어,
교우들에게 실망, 더 나아가서는 주님에 대한 실망으로 연결되기도 합니다.

그럴수록, 나의 소명에 충실하고,
늘 전후로 기도하는 마음으로 봉사에 임한다면,
남에게 드러내기 위한 봉사가 아니라,
하느님의 부르심을 따르는 기쁨의 소명으로 받아들여지는 것 같습니다.

주님의 길을 성실히 걷는 과정중에
동행자를 발견하고, 함께 기쁨을 나누는 일은
우리의 신앙생활을 더욱 든든히 해줍니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일터에서나 휴가지에서나
매일 매일 한결같이 소중한 주님의 말씀을 전해주시는 형제님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