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복음 묵상 】10/18 토요일 성 루카 복음사가 축일…양승국 신부님
10월 18일 토요일 성 루카 복음사가 축일-루카 10,1 - 9
그때에 주님께서는 다른 제자 일흔두 명을 지명하시어, 몸소 가시려는 모든 고을과 고장으로 당신에 앞서 둘씩 보내시며,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가거라.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마라.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먼저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 하고 말하여라. 그 집에 평화를 받을 사람이 있으면 너희의 평화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르고,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되돌아올 것이다. 같은 집에 머무르면서 주는 것을 먹고 마셔라. 일꾼이 품삯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이 집 저 집으로 옮겨 다니지 마라. 어떤 고을에 들어가든지 너희를 받아들이면 차려 주는 음식을 먹어라. 그곳 병자들을 고쳐 주며, ‘하느님의 나라가 여러분에게 가까이 왔습니다.’ 하고 말하여라.” (루카 10,1-9)
<무심한 나그네>
2세기 중엽 한 익명의 신앙인에 의해 쓰인 글귀는 ‘진정한 나그네’로서의 삶이 어떤 것인지를 잘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각자 자기 고향이 있으면서도 마치 타향살이 나그네와 같이 삽니다. 시민으로서 모든 의무를 수행하지만 나그네와 같이 모든 것은 참아 받습니다. 타향 땅이 고향 같고 고향이 다 타향과 같습니다. 그들은 지상에 살고 있으나 하늘의 시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복음 선포’란 사명을 제자들을 부여하고 나서 세상으로 파견하십니다. 파견에 앞서 간단한 당부를 하시는데, 그 핵심이 어느 한 곳에 연연해하지 말고 ‘무심한 나그네’처럼 처신하라는 것입니다.
가끔씩 사람들은 저희 수도자들을 보고 ‘부럽다’고 하십니다. 왜 부럽냐고 여쭈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신부님, 수사님들은 세상 걱정 하나도 하지 않고, 매일 기도 속에 거룩하게 지내시고, 부양해야할 가족도 없으니 얼마나 좋으냐?”
그런 면도 없지 않으나 다 그런 것은 아닙니다. 수도생활, 적당히 기도나 하고, 적당히 봉사하고, 놀고먹는 그런 삶이 절대로 아니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연마해나가는 과정에서 치열하게 자신과 투쟁해야 합니다. 같은 길을 걷는 이웃들과의 관계 안에서 벌어지는 많은 일들 안에서 한없는 인내도 필요합니다. 때로 아무것도 아닌 일로 머리 터지게 싸우기도 합니다. 지극히 사소한 일로 인해 정말 자존심 ‘팍’ 상하기도 하고, 엄청 속이 상해 욕이 입까지 치밀어 오를 때도 한두 번이 아닙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부럽다, 얼마나 좋으냐?’는 말씀에 수긍이 갑니다.
때로 홀가분하게 모든 것 떨쳐버리고 홀연히 또 다른 세상을 향해 나아갈 기회가 가끔씩 주어지니 얼마나 행복한지 모릅니다.
세상살이 하는 분들, 어쩔 수 없이 잔뜩 어깨에 짊어지고 가야만 하는 그 ‘인연의 무게’에 대한 압박감이 조금은 덜하며, 그 대신에 더 깊이 또 다른 가치관을 추구할 수 있으니 얼마나 행복한지 모릅니다.
본격적인 복음 선포에 매진하려는 제자들에게 세상 그 어느 것에로도 묶이지 말기를 당부하시는 예수님께서는 ‘무소유’, ‘집착으로부터의 탈피’, ‘버림’, ‘떠남’을 강조하십니다.
그 모든 것을 포기하라는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보다 영원한 가치관, 보다 고상하고 아름다운 대상, 그래서 한번 투신해볼 가치가 충분한 목적인 하느님 나라를 위해 작고 부차적인 것을 포기하라는 말씀이겠지요.
다시금 덕지덕지 붙어있는 제 영혼의 군더더기들을 바라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는 것을 가로막는 영혼의 장애물들을 바라봅니다.
크신 하느님, 자유로우신 하느님, 전지전능하신 하느님께서 직접 창조하신 저 청명한 하늘을 바라보며, 또 다시 모든 것 훌훌 털어버리고, 홀로 떠나는 ‘무심한 나그네’를 꿈꿉니다.
†살레시오회 수도원 수련원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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