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복음 묵상 】10월 17일 금요일 안티오키아의 성 이냐시오 주교 순교 기념일…양승국 신부님
10월 17일 금요일 안티오키아의 성 이냐시오 주교 순교 기념일-루카 12,1-7
그때에 수많은 군중이 모여들어 서로 밟힐 지경이 되었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제자들에게 말씀하기 시작하셨다. “바리사이들의 누룩 곧 위선을 조심하여라. 숨겨진 것은 드러나기 마련이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지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너희가 어두운 데에서 한 말을 사람들이 모두 밝은 데에서 들을 것이다. 너희가 골방에서 귀에 대고 속삭인 말은 지붕 위에서 선포될 것이다. 나의 벗인 너희에게 말한다. 육신은 죽여도 그 이상 아무것도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누구를 두려워해야 할지 너희에게 알려 주겠다. 육신을 죽인 다음 지옥에 던지는 권한을 가지신 분을 두려워하여라. 그렇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바로 그분을 두려워하여라. 참새 다섯 마리가 두 닢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그 가운데 한 마리도 하느님께서 잊지 않으신다. 더구나 하느님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 두셨다.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 (루카 12,1-7)
<사람으로부터 편안해지는 법>
지방에 다녀오는 차 안에서 소노 아야코 여사의 ‘사람으로부터 편안해지는 법’을 읽었습니다.
터미널에서 차 시간을 기다리다가 ‘혹시 올라가며 볼만한 책 있을까’해서 간이서점 앞에 섰을 때 제일 먼저 제 눈에 띤 책입니다.
세상으로부터, 또 인간으로부터, 관계로부터 무척이나 자유로워 보이는 작가의 여유 있는 삶과 부드러운 인생관을 엿볼 수 있어 좋았습니다.
보통 우리는 세상으로부터, 사람들로부터 잊혀지는 데 대한 두려움이 꽤 크지요. 그러나 소노 아야코 여사는 이렇게 강조합니다.
“외딴 구석에 산다는 것은 참으로 멋지고 대단한 일이다. 나쁜 영향은 덜 받게 되고 우쭐해하는 일도 없으며 동시에 기본적인 자유를 구가할 수 있다. 자유 없는 생활이란 인간의 기본적인 행복조차 거부당하는 일이다. 그래서 그런 직업(예를 들어 정치가)에 연연해하는 사람의 마음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대면하기 싫은 사람, 만나면 스트레스만 안겨주는 사람들과의 만남 앞에 우리는 일단 걱정이 앞섭니다. 관계에서 오는 스트레스가 만만치 않습니다.
그러나 소노 아야코 여사는 이렇게 속삭입니다.
“나 정도 나이가 돼 봐요. 싫은 사람도 아무렇지 않게 대하게 되요. 희한한 사람 만나 재미있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요.”
“내가 이렇게 바닥까지 내려섰는데 어쩌나? 내 삶이 전혀 향기롭지 못한데 어쩌나? 내 영혼이 이렇게 병들었는데 어쩌나?” 우리는 많은 고민을 하지요.
그러나 소노 아야코 여사는 이런 말로 우리를 위로합니다.
“썩기 시작한 과일, 마음이 병들고 있는 사람은 사회나 주위에 왕왕 폐를 끼치지만, 가끔은 근사한 향기를 발산한다. 물론 상식적으로 말하면 과일은 썩지 않은 편이, 사람의 마음은 병들지 않은 편이 좋다. 그러나 썩는 부분 없이는 인생의 향기도 없다.”
몇 꼭지 단순하고 소박한 그녀의 글을 읽으면서 산전수전 다 겪은 한 노작가의 달관한 인생의 부드러움과 자유로움을 느낄 수 있어 좋았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두려워하지 말라고 누누이 강조하십니다.
저 역시 한때 두려움이 참으로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아침이 밝아오면 “하느님, 이렇게 새로운 하루를 주셨으니 감사합니다.”라고 외쳐도 감지덕지인데, “오늘 하루를 또 어떻게 살아가나” 고민하던 때도 있었습니다. 밤이 찾아오면 무사히 하루를 넘긴 데 감사하며 홀가분한 마음으로 잠자리에 들면 될 것을 “이 밤을 또 어떻게 넘기나. 내일 아침을 살아서 맞이할 수 있을까? 내일 하루는 또 어떻게 보내나” 하고 걱정했습니다.
고통이 심하면 심해서 걱정, 고통이 없으면 없는 대로 걱정, 날씨가 궂어도 걱정, 맑아도 걱정...하루 온종일 걱정과 두려움으로 소일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행사가 아직 시작되지도 않았는데도, 혹시 잘못되면 어쩌나 걱정...그러니 삶은 온통 회색빛이더군요. 하루하루가 지옥이었습니다.
그런 제게 주님께서 계속 되풀이해서 말씀하셨습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두려워하지 마라. 두려워하지 마라.”
“정작 가장 두려워할 분은 하느님이시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지니고 살아가는 두려움의 근원이 무엇인지 생각해봅니다.
또래로부터 ‘따’ 당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에서 오는 두려움, 세상 사람들로부터 잊혀지면 어쩌나 하는 걱정에서 오는 두려움, 사람들로부터 인정받지 못하고 도태되면 어쩌나 하는 데서 오는 두려움...대체로 사람들, 관계들, 이 세상 현실로부터 대부분의 두려움을 느낍니다.
사실 이런 두려움은 부차적인 것입니다. 정작 가장 중요한 것은 늘 우리가 잊고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하느님으로부터 잊혀지면 어쩌나 하는 걱정에서 오는 두려움, 하느님 사랑으로부터 제외되면 어쩌나 하는 걱정에서 오는 두려움, 하느님 나라에 입성하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에서 오는 두려움이 우리에게 가장 큰 두려움이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 또한 걱정할 필요가 없는 듯 합니다.
아직 우리가 이 땅위에 살아있다는 것은 하느님 자비와 사랑을 충만히 받고 있다는 표시이기 때문입니다. 아직도 우리가 숨쉬고 있다는 것은 하느님께로 돌아설, 그분의 품으로 다시 돌아갈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는 표시이기 때문입니다.
†살레시오회 수도원 수련원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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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나의 복음 묵상
"하느님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 두셨다.
처음 이 부분의 복음 말씀을 묵상했을 때의 당혹감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저로서는 잊어 버리고 싶은 그 모든 것을 하느님께서는 알고 계신다고 생각하니 머리가 쭈뼛 섰습니다.
그러나 오늘은 그래도 이쁘게 보이는 일도 가끔 하니까 이것도 알고 계시겠지 하는 생각을 할 여유도 생겨 다행이다 싶습니다.
두려워 할 것이 없습니다.
*** 나의 삶의 자리에 접지하기 ***
비천한 모습으로 다가오시는 주님을 두려워 하면서 살아가는 하루 ... ...
안셀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