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복음 묵상 】11/17 월요일 헝가리의 성녀 엘리사벳 수도자 기념일…양승국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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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17일 월요일 헝가리의 성녀 엘리사벳 수도자 기념일- 루가 18,3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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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예리코에 가까이 이르셨을 때의 일이다. 어떤 눈먼 이가 길가에 앉아 구걸하고 있다가, 군중이 지나가는 소리를 듣고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사람들이 그에게 “나자렛 사람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 하고 알려 주자, 그가 “예수님,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부르짖었다. 앞서 가던 이들이 그에게 잠자코 있으라고 꾸짖었지만, 그는 더욱 큰 소리로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쳤다. 예수님께서 걸음을 멈추시고 그를 데려오라고 분부하셨다. 그가 가까이 다가오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물으셨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그가 “주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하였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다시 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고 이르시니, 그가 즉시 다시 보게 되었다. 그는 하느님을 찬양하며 예수님을 따랐다. 군중도 모두 그것을 보고 하느님께 찬미를 드렸다. (루카 18,35-43)


<참혹하다. 사는 게 너무나 참혹해>

매일 와 닿던 육체적 고통이 얼마나 극심했던지, 어떤 분은 자신의 삶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너무 염세주의적으로 들릴 수 있겠지만, 자신이 체험한 세상살이의 고달픈 실상을 솔직히 하소연하고 있습니다.

“참혹하다. 사는 게 너무나 참혹해. 영혼이란 것이 있어 얼마나 다행인가? 우리가 육신을 버리고 후생에서 영혼만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위안인가?”

충분히 이해가 가는 표현이지요. 때로 하루를 산다는 것,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여길 수 있겠지만, 어떤 사람에게 있어 그 하루를 살아낸다는 것이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 모릅니다. 하루를 견뎌내기 위해 얼마나 많은 상처와 굴욕, 좌절과 눈물이 요구되는지 모릅니다.

인간이 하늘이기에 인간은 이 세상 피조물 가운데 가장 소중하다. 인간은 생명이 붙어 있는 한 그 자체로 가장 존귀하며 사랑받아야 한다는 진리를 잘 알고 있지만, 현실이 어디 그런가요?

끝도 없는 지루한 일상과 맞서야 하고, ‘나’와 철저하게도 다른 ‘너’란 존재를 견뎌내야 합니다. 나란 존재의 비참함도 참아내야 합니다. 때로 가식과 위선, 모순과 폭력으로 둘러싸인 구조 안에서 그저 바보처럼 웃어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예리고의 소경이 그러했습니다. 한 평생을 시각장애인으로 살아온 예리고의 소경이었습니다.

아직 미흡한 점이 많지만, 요즘은 장애우들에 대한 의식전환이 조금씩이나마 이루어지고 있지요. 아직 갈 길이 요원하지만, 장애우들을 위한 공동체적, 사회적 배려가 미비하나마 조금씩 눈에 띄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예수님 시대, 장애우들을 위한 그런 마인드나 배려를 전혀 기대할 수가 없었습니다.

예리고의 소경, 그는 자신이 지닌 시각장애를 극복하기 위한 아무런 노력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저 그 답답함을 견디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나이가 점점 들어갔지만, 우선 목구멍이 포도청인 관계로 결혼은 꿈도 꿀 수 없었을 것입니다. 유일한 의지가지였던 부모마저 세상을 떠나고 나니, 가족 친지, 친구들마저도 등을 돌렸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위한 사회안전망이 제대로 가동도 안 되던 시절, 예리고의 소경이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구걸’뿐이었습니다.

시각장애로 인한 불편함은 그런대로 습관이 되어 견딜 만 했습니다. 걸을 때는 발에 의지하고 걸었습니다. 물건을 잡을 때는 손에 의지했습니다. 소리가 날 때는 귀에 의지해 소리를 듣고 세상을 보았습니다. 해가 뜨고 지는 것은 몸이 피로한 것을 통해 확인했습니다. 물건의 모양과 빛깔은 꿈으로 보았습니다.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때운다고 그는 눈이 보이지 않았지만 불편함을 참고 그럭저럭 살았습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로 부터 ‘무가치한 존재’로 인식되는 것은 죽기보다 싫었습니다. 늘 남들의 조롱거리가 되는 것은 도무지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이 세상에 왔으니, 이름을 남기고 싶어 합니다. 뭔가 세상에 기여를 하고 싶어 합니다. 그것은 본능적인 욕구 못지않게 중요한 것입니다. 나는 별 의미 없는 존재라고 여겨질 때, 그것처럼 견디기 힘든 일도 없습니다.

예리고의 소경 역시 비록 장애를 지녔지만 뭔가 좋은 일을 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내 코가 석자인데, 내 한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데, 도대체 무얼 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저 구걸해서 하루를 연명하는 일, 도움의 손을 펼치는 일, 그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전부였습니다.

이런 삶의 역사와 배경을 지니고 살아왔던 예리고의 소경이기에 예수님을 만나는 데 있어 각오는 남달랐습니다. 잠시 후 있게 될 예수님과의 만남을 자신에게 찾아온 마지막 기회로 여겼습니다. 지금까지의 삶을 일단락 짓는 기회, 자신의 삶을 180도 완전히 반전시킬 유일한 기회로 삼았습니다. 나름대로의 각본도 짰습니다. 이렇게 나오면 이렇게 대응한다는 마음의 준비도 했을 것입니다.

이런 예리고의 소경의 철저한 준비, 절박한 상황, 간절한 심정, 지난 아픈 과거를 예수님께서 놓칠 리가 없습니다.

젖 먹던 힘까지 보탠 그 간절한 외침, 자신 안에 남아있던 모든 에너지를 다 바쳐서 외치는 그 절박한 목소리를 예수님께서는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다윗의 자손이신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드디어 꿈이 현실로 다가왔습니다. 예수님이 그를 눈여겨보십니다. 그를 당신 가까이 부르십니다. 가난과 서러움, 눈물과 상처뿐인 그의 인생을 굽어보십니다. 마침내 그에게 새 삶을 부여하십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자비 앞에 예리고의 소경은 기뻐서 어쩔 줄을 모릅니다. 너무나 감사했던 그는 치유 받은 즉시 예수님을 따라나섭니다. 예수님의 공동체에 편입됩니다. 이를 보고 사람들은 한 목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합니다.

오늘 우리 역시 절박한 심정으로, 그 옛날 예리고의 소경의 간절한 마음으로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길 바랍니다.

영적인 눈을 한번 눈을 떠보십시오. 지금까지의 삶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새로운 삶이 시작될 것입니다. 과거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가치관과 행동양식, 새로운 몸가짐과 마음가짐이 우리에게 부여될 것입니다. 그 삶이 곧 영적인 눈을 뜨는 삶입니다. 그 삶은 바로 회개의 삶이요, 주님 안에서의 삶입니다.

†살레시오회 수도원 수련원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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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복음 묵상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저는 무엇을 바라고 있는가?
"영원한 생명을 바랍니다."라는 모범 답안을 알고 있긴 합니다만
입에 담지를 못하는 것은 ... ...

아직도 제 마음 저 밑 바닥에는 안정된 세속의 삶을 바라는 마음이 앞서서이겠지요.

그나마 어줍잖은 봉사랍시고 하고나면
주님께서 주시는 마음의 평화에 조금씩이나마 맛들이고 있으니
그나마 다행이다 싶습니다.

*** 나의 삶의 자리에 접지하기 ***
절박한 심정으로 치열하게 사는 하루 ... ...
안셀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