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회(Society of St. Vincent de Paul) 소개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회 창설 과 발전

1833년 당시 파리 소르본대학교의 법과대학생이었던 오자남은 토론 모임인 ‘역사 협의회'의 활동을 통해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봉사 활동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동료들과 함께 ‘자선 협의회'를 설립하여 자선활동을 시작하였다. 그러다가 조직적인 활동을 위해 몇 개의 ‘협의회'를 새로 만드는 가운데 그들은 1834년 2월에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를 수호 성인으로 정하고, 1835년에는 회의 명칭을 ‘빈첸시오 아 바오로회'로 바꾸었다. 아울러 같은 해 12월 8일에는 성인의 저서에 기초하여 회칙을 제정하였고, 1845년에는 교황 그레고리오 16세로부터 공적인 평신도 단체로 승인을 받았다. 이렇게 조직과 규모면에서 성장을 거듭한 빈첸시오회는 현재 150개 이상 나라 에서 백만 명이 넘는 회원들이 활동하고 있는 국제적인 조직체로 발전 하였다.

주보성인: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Saint Vincent de Paul), 축일: 9월 27일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는 1581년 4월 24일 프랑스 남서부 랑드 지방에 있는 닥스시 근처 푸이에서 가난한 농가의 6남매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빈첸시오 아 바오로는 남달리 총명했던 12살 때 닥스에 있는 코르들리에회 수도원에 보내져 드 코메 집안의 가정교사로 일하며 신학과정을 마친후, 1600년 9월 13일 생 줄리앙성의 성당에서 사제서품을 받았다. 그후 , 빈첸시오는 1610년 마르그리트 여왕의 빈민 구제계를 담당하였고 그후 클리쉬 주임신부로 일하다가 세력있는 드 공디가의 가정교사로 임명 받기도 했다.
1617년 샤띠옹 레 동부에 주임신부로 부임한 빈첸시오는 40년 전부터 내려오는 이 본당에서의 여러 가지 병폐등을 개선하는 한편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애덕부인회'를 창설하여 그들을 돌보게 하였다. 1625년 1월 25일에는 당시 폐쇄적인 성직자들의 양성과 재교육의 필요성을 느끼고 '선교회 (라자리스트회)'를 창설하였다. 당시 많은 전염병으로 죽어가는 사람들을 위해 가정을 가진 애덕회 부인들만으로 간호할 수가 없어 성루이즈 드 마리약의 도움을 얻어 1633년 11월 29일 가난한 이들의 영신적,육체적 봉사를 위해서 가난한 이들의 종들이라 불리우는 '사랑의 딸회'를 창설하였다.
1660년 9월 27일 79세를 일기로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의 곁을 떠난 그는 1737년 6월 16일 성인 품에 오르셨고
1885년에는 교황 레오13세에 의해 모든 자선사업 단체의 주보성인으로 선포되었다.

창 설 자: 성 프레데릭 오자남(Saint Frederic Ozanam), 축일: 9월 8일

앙토안느 프레데릭 오자남 (Antonie Fredric Ozanam)은 1813년 4월 23일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태어났다. 리용 출신인 그의 부모님은 나폴레옹 전쟁이 끝난 후 임시로 밀라노에서 정착하여 살고 있었다.
오자남은 행복한 유년기를 보냈다. 영민하고 통찰력이 깊은 그는 흔히 철학 초보자들이 겪는 일종의 불신과 회의론에 빠진 적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당대의 탁월한 철학자로 명성을 떨치던 노아로 신부 (Fa ther Noirot)를 만나게 되고 그의 도움으로 회의주의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한 의미에서 노아로 신부는 오자남의 카톨릭 신앙을 확고히 다져 준 분이었다. 지식과 성덕을 겸비한 성인 사제 노아로 신부를 '영혼의 탁월한 교육자'라고 불렀다. 이렇게 청년기의 위기를 벗어난 오자남은 열린 정신의 신앙인으로 성숙해 갔다. 그의 신앙은 진리의 원천에서 물을 마실 수 없는 불안한 영혼들을 도와주고 싶은 불타는 열정으로 나타났다. 1833년 6명의 학생들과 같이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 성인의 정신을 이어 받은 평신도 의 빈민구제 단체인 빈첸시오 아 바오로회 를 창설하였다. 오자남은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고 도와주는 일을 자신의 삶의 목표로 정했다. 그리고 죽는 날까지 이 목표에 충실하였다. 1997년 시복 되시고 2005년 시성 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