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234] ⑩ EP 4 - 교회 가지: 제 9 계명 - 고감도 사랑의 친교를 이룬다

[EP-1234] ⑩ EP 4 - 교회 가지: 제 9 계명 - 고감도 사랑의 친교를 이룬다

▨친교(koinonia)의 사명

 친교는 교회가 개인주의, 형식주의, 수직적 위계구조 등의 모습에서 벗어나 신자들 간 온전한 신뢰와 사랑, 인격적 만남으로 삼위일체의 삶을 구현하는 공동체라는 점에서 교회의 본질적 존재방식이자 사명이다.

  친교는 생활과 신앙 차원에서 물질적이든 정신적이든 가진 것을 함께 나눔으로써 일치를 이루는 것을 의미한다. 친교가 교회의 기본 사명에 속하는 이유는 교회가 본질적으로 한분 하느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살아가는 가족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또한 친교는 삼위일체 신앙의 정수다. 삼위일체의 본질은 사랑이며, 따라서 사랑의 친교는 바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과 관련된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요한 13,35).
 
 ▨여러 차원의 친교

  친교는 여러 차원에서 요청된다. 첫째는 신자들 사이의 내적 친교다. 교회 공동체의 대형화와 익명화 현상은 '소외의 보편화' 현상을 낳고 있는데 이는 친교의 필요성을 더욱 강하게 드러내고 있다. 그래서 교회는 신자들이 열린 대화를 통해 서로 인격을 나눌 수 있도록 장을 마련해주거나 중재하고 소공동체 활성화를 통해 인격적 나눔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이 필요하다.

 둘째는 종파와 종교를 달리 하는 이들과 외적 친교다. 개신교 신자들, 타종교 신자들과 대화를 통해 친교를 도모하고, 비신자들과도 사귐과 나눔을 통해 친교를 증진하는 것이 필요하다.

 셋째는 연대적 사랑의 친교다. 특별히 가난한 이들에 대한 우선적 사랑, 원수를 향한 사랑으로 이어지는 연대적 사랑은 친교의 영성이 지향하는 바다. 이는 친교가 궁극적으로는 섬김과 통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깨우쳐 주는 대목이다.
 
 ▨고감도 사랑의 친교

  그동안 가톨릭 신자들은 마음에 사랑을 품고 있어도 드러내지 않는 것을 겸덕으로 여겨왔다. 그래서 개신교 신자들에 비해 덜 친절했다. 그러나 오늘날은 '마음만'으로는 통하지 않는 시대다. 드러내야 하고 표현해야 한다. 친절하고 따뜻한 표정, 말씨와 자세 등으로 서로를 안아줄 수 있어야 한다. 공동체를 위해 자기 욕심을 버리고 겸손하며 남을 이해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친교의 핵심은 사랑이다. 사랑이 없는 행위는 아무런 의미가 없고 진정으로 하느님의 뜻을 이룰 수 없다. 그리스도인의 모든 행위 바탕에는 사랑이 있어야 한다. 이 사랑은 타인이 나와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 사람의 다름과 잘못까지도 받아들인다. 사랑은 또한 혼자만 차지하는 것이 아니라 남에게 전해야 한다. 우리는 하느님 사랑을 듬뿍 받았다. 그 사랑을 주변에 옮겨야 한다.
 
 ▨고감도 사랑과 소공동체

  고감도 사랑은 규모가 작을수록 수월해진다. 공소 공동체는 규모나 시설에서는 열악한 상황이지만 사랑의 나눔과 친교 공동체로서는 모범이 될 수 있다. 현재 농촌을 제외한 대부분의 도시 본당은 신자가 2000명이 넘고 대도시 본당 신자는 5000명에 가깝다. 교회가 10여년 전부터 소공동체 운동을 펼치고 있는 것도 이렇게 대형화한 본당에서는 고감도 사랑의 공동체를 이룰 수 없기 때문이다.

 고감도 사랑을 나누는 소공동체를 이루기 위해서는 적절한 규모가 중요하다. 적절한 규모의 공동체를 구분하는 식별 기준은 다음과 같다.

  첫째, 모든 이에게 공통적으로 있는 인간성이 발견될 수 있을 만큼의 크기. 곧 고통과 두려움과 즐거움을 서로 나눌 수 있는 공간이어야 한다. 둘째, 각자가 하나의 인격으로 받아들여질 만큼 개별성이 보장돼야 한다. 셋째, 최대한도의 인간적 가까움, 안온함, 공동 연대감 등을 느낄 수 있을 만큼 작은 규모여야 한다. 넷째, 공동체 성원이 자신의 공동 책임성을 실천할 수 있는 만큼의 규모여야 한다. 다섯째, 개별 공동체 성원이 공동체 전체의 운영에 영향을 끼칠 수 있을 만큼의 크기여야 한다.

 주의할 것은 끼리끼리 모임을 구성하지 말아야 한다.

정리=이창훈 기자
[평화신문 2006.06.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