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복음 묵상 】2월 20일 사순 제2주간 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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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20일 사순 제2주간 수요일 - 마태오 20,17-28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실 때, 열두 제자를 따로 데리고 길을 가시면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보다시피 우리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있다. 거기에서 사람의 아들은 수석 사제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넘겨질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사람의 아들에게 사형을 선고하고, 그를 다른 민족 사람들에게 넘겨 조롱하고 채찍질하고 나서 십자가에 못 박게 할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아들은 사흗날에 되살아날 것이다.” 그때에 제베대오의 두 아들의 어머니가 그 아들들과 함께 예수님께 다가와 엎드려 절하고 무엇인가 청하였다. 예수님께서 그 부인에게 “무엇을 원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 부인이 “스승님의 나라에서 저의 이 두 아들이 하나는 스승님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을 것이라고 말씀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 “너희는 너희가 무엇을 청하는지 알지도 못한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하고 물으셨다. 그들이 “할 수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내 잔을 마실 것이다. 그러나 내 오른쪽과 왼쪽에 앉는 것은 내가 허락할 일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정하신 이들에게 돌아가는 것이다.” 다른 열 제자가 이 말을 듣고 그 두 형제를 불쾌하게 여겼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가까이 불러 이르셨다. “너희도 알다시피 다른 민족들의 통치자들은 백성 위에 군림하고, 고관들은 백성에게 세도를 부린다. 그러나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 (마태 20,17-¬28)

<메시아로서의 고통과 비애>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의 메시아로서의 고통과 비애가 절절이 느껴지는 장면이 묘사되고 있습니다.

예수님 입장에서 볼 때, 일반 사람들이 예수님 당신을 오해하는 것, 어느 정도 감내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토록 집중 교육을 시켜왔던 제자들마저 예수님의 신원에 대한 철저한 몰이해는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었고 정녕 슬픈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예정해주신 장소, 예루살렘으로 ‘죽으러’ 올라가고 계시는데, 제자들은 아직도 예수님의 신원에 대해 전혀 감도 잡지 못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요한과 야고보 사도의 어머니는 뭔가 한보따리 예수님 앞에 ‘상납’해놓고는 인사 청탁을 하고 있습니다. 어머니가 자발적으로 인사 청탁했을 가능성도 있겠지만, 두 사도가 어머니께 부탁했을 가능성도 큽니다.

그런데 청탁의 내용도 너무나 노골적이고 강압적이고, 또 단도직입적이어서 낯 뜨거울 정도입니다.

“스승님의 나라에서 저의 이 두 아들이 하나는 스승님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을 것이라고 말씀해 주십시오.”

그들의 예수님 추종은 다분히 이기적인 것이었습니다. 개인적 야심과 욕망의 충족의 도구로 예수님을 활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성공의 발판으로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해 물 좋은 자리 하나를 챙기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해 크게 한 몫 보려고 기를 쓰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의 신앙은 아직도 갈 길이 멀었습니다. 그들의 예수님 추종방식은 아직도 유아적이었습니다. 그들의 성숙도는 한참 바닥이었습니다.

우리 역시 심각하게 스스로를 향해 반문해봐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믿고, 예수님을 추종하며, 교회를 선택하는 과정에서 어떤 특권이나 특혜를 찾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예수님을 팔아서 끝도 없는 자신의 이기적인 욕구를 충족시키고자 하는 것은 아닌지요?

오늘 첫 번째 독서인 예레미야 예언서의 말씀을 통해 우리는 신앙이란 것이 그렇게 단순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신앙이란 것이 그렇게 만만한 것, 적당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 추종이, 예수님의 제자됨이 그리 쉬운 것이 아니라는 것도 잘 알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가 처음 하느님으로부터 불림을 받았을 때의 나이는 겨우 16세였습니다. 요즘 16세면 아직 머리에 피도 마르지 않은 중학생입니다.

예레미야는 너무나 황당했고 기가 차지도 않아 하느님의 부르심에 귀를 막습니다. 너무나 어렸고, 너무나 부족함을 느꼈기에 기를 쓰고 거절하고 도망갑니다.

그러나 하느님도 만만치 않으십니다. 기를 쓰고 도망가는 예레미야의 뒤를 기를 쓰고 쫒아가서 끝끝내 예언자로서의 사명을 부여하십니다.

이윽고 어린 예레미야에게 사명을 부여하시는데, 이것은 더 받아들이기 힘든 일이었습니다. ‘중3짜리’에게 내리신 부탁은 ‘예루살렘의 멸망’을 선포하는 것이었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중3짜리 애송이’가 산전수전 다 겪은 노회한 유다 지도층 인사들과 만백성 앞에 가서 이스라엘의 파괴와 멸망, 그리고 신속한 회개를 외치기 시작하니 반응이 어떻겠습니까?

결과는 불을 보듯이 뻔했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바라보며 미친 사람 취급했습니다. 자꾸 헛소리해대는 그를 죽이려고까지 했습니다. 결국 그는 완벽한 ‘왕따’가 되었습니다. 예레미야의 한 평생은 제대로 된 왕따 인생이었습니다. 가족들은 물론, 친구, 친지, 온 백성이 그를 두고 비웃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들려오는 하느님의 신탁은 “계속해서 예루살렘의 폐망을 알려라”는 것이었습니다.

얼마나 괴로웠던지, 예레미야는 마침내 자신이 태어난 날 조차 저주합니다.

예수님을 추종하는 일, 예수님의 뜻에 따라 살아가는 일, 물론 아주 행복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에 못지않게 가시밭길입니다. 십자가의 길입니다. 숱한 희생과 포기가 요구되는 일입니다.

그래도 그 길을 걸어가는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좋은 것을 그리 많이 주셨는데, 나쁜 것이라고 어찌 마다할 수 있겠습니까?

†살레시오회 수도원 수련원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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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복음 묵상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어제에 이어 오늘도 '자리'라는 말이 절 이끕니다.
어떤 자리에 오르기도 힘들지만 지키기도 함듭니다.
오름도 지킴도
제 힘이 아니라
저와 함께 일하는 모든 사람이 도와주지 않으면 안됩니다.

오늘의 저의 이 자리도
윗 선에서 끌어 주었다기 보다는
아래에서 묵묵히 절 받쳐주었기에 지킬 수있었음을 저는 압니다.
그래서 저는 이들을 섬길 수 밖에 없습니다.

*** 나의 삶의 자리에 접지하기 ***
이미 시위를 떠나버린
새로 정비한 부서 조직이
모두를 위한 변화가 될 수 있도록
주님께서 이끌어 주시길 기도합니다. 아멘.
안셀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