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복음 묵상 】3월 5일 사순 제4주간 수요일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유다인들에게, “내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이 때문에 유다인들은 더욱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였다. 그분께서 안식일을 어기실 뿐만 아니라, 하느님을 당신 아버지라고 하시면서 당신 자신을 하느님과 대등하게 만드셨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아버지께서 하시는 것을 보지 않고서 아들이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그분께서 하시는 것을 아들도 그대로 할 따름이다. 아버지께서는 아들을 사랑하시어 당신께서 하시는 모든 것을 아들에게 보여주신다. 그리고 앞으로 그보다 더 큰 일들을 아들에게 보여주시어, 너희를 놀라게 하실 것이다. 아버지께서 죽은 이들을 일으켜 다시 살리시는 것처럼,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이들을 다시 살린다. 아버지께서는 아무도 심판하지 않으시고, 심판하는 일을 모두 아들에게 넘기셨다.
모든 사람이 아버지를 공경하듯이 아들도 공경하게 하시려는 것이다. 아들을 공경하지 않는 자는 아들을 보내신 아버지도 공경하지 않는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내 말을 듣고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이는 영생을 얻고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는 이미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갔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죽은 이들이 하느님 아들의 목소리를 듣고 또 그렇게 들은 이들이 살아날 때가 온다.
지금이 바로 그때다. 아버지께서 당신 안에 생명을 가지고 계신 것처럼, 아들도 그 안에 생명을 가지게 해주셨기 때문이다. 아버지께서는 또 그가 사람의 아들이므로 심판을 하는 권한도 주셨다. 이 말에 놀라지 마라. 무덤 속에 있는 모든 사람이 그의 목소리를 듣는 때가 온다. 그들이 무덤에서 나와, 선을 행한 이들은 부활하여 생명을 얻고 악을 저지른 자들은 부활하여 심판을 받을 것이다. 나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다. 나는 듣는 대로 심판할 따름이다. 그래서 내 심판은 올바르다. 내가 내 뜻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요한 5,17-30)
“어린 것들이 지닌 것은 ‘생명’이고, 어른이 지닌 것은 ‘징하게 질기고도 모진 목숨’이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유념할 것이 있습니다. 그 어떤 생명이든, 우리가 지니고 있는 이 생명, 이거 보통 대단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지니고 있는 생명을 시시하게 여깁니다. 무가치하게 여깁니다. 하찮게 생각합니다. 구질구질하고 구차한 것으로 여깁니다. 지루하니 빨리 끝냈으면, 하고 생각합니다.
더 한 분들도 계십니다. 자신의 꼬이고 꼬인 삶을 바라보며 ‘썩어질 인생!’하고 외칩니다. ‘도대체 왜 태어났니?’하고 비아냥거립니다.
어떤 분들은 내 생명, 이거 내 소유인데 당연히 내가 좌지우지할 수 있다고 착각합니다. 그래서 그 소중한 생명을 스스로 파괴하고 끊기까지 합니다.
참으로 어처구니없고 위험한 생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생명은 그 어떤 형태를 지니고 있다할지라도 목숨이 붙어있는 한 그 자체로 이 세상에서 가장 존귀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생명은 바로 하느님께서 부여하신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생명이 붙어있는 인간 존재는 그 자체로 하느님의 모상이자 분신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이 세상 그 어떤 생명이든 존중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때로 많은 분들, ‘모질기도 해라’ ‘이토록 구차한 삶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이런 꼴로 사느니 차라리 빨리 세상 뜨는 것이 더 바람직하지 않을까?’ 고민하십니다.
그러나 생명이 붙어있는 한 어쩔 수 없습니다. 끌고 가는 수밖에 없습니다. 끼고 사는 수 밖에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마지막 순간까지 나아가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바입니다.
생명이 붙어있다는 것, 절대로 시시하게 여기지 마십시오. 생명이 붙어있다는 것은 아직도 하느님 은총 안에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생명이 붙어있다는 것은 아직도 하느님 자비의 손길 안에 거닐고 있다는 표시입니다. 생명이 붙어있다는 것은 아직도 회개의 가능성, 변화의 가능성, 성화의 가능성, 구원의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는 표징입니다.
아직도 우리가 이 세상에 남아있다는 것, 아직도 두발로 걸어 다니고 있다는 것, 보통 특별한 일이 아닙니다.
우선 살아있어야 하느님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축복을 만끽할 수 있습니다. 우선 살아있어야 하느님께서 무상으로 증여하시는 당신의 생명을 부여받을 수 있습니다.
때로 우리의 생명, 너무 보잘 것 없어 보입니다. 거듭되는 죄로 인해 상처입고 손상되어 보입니다. 심연의 바닥에서 헤매고 있는 우리의 영혼이 부끄럽기만 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우리의 결핍과 죄악은 역설적이게도 생명의 주관자이신 하느님의 관심과 배려를 불러일으킵니다. 우리의 이 부족함과 나약함은 무한한 하느님의 자비와 연민을 불러일으킵니다.
그 어떤 심각하고 열악한 상황 앞에 놓여있을지라도 생명을 포기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삶은, 생명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너무나 경이로운 것입니다. 너무나 사랑스럽고 소중한 것입니다.
하느님의 풍성한 자비와 사랑에 힘입어 재생이 가능한 것, 회복이 가능한 것, 변화가 가능한 것, 새 출발이 가능한 것이 바로 우리의 생명입니다.
†살레시오회 수도원 수련원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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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나의 복음 묵상
"하느님을 당신 아버지라고 하시면서 당신 자신을 하느님과 대등하게 만드셨기 때문이다."
제 기억으로는 성경 말씀을 통털어
예수님께서 직접적으로 당신 자신을 하느님과 같다고 하신적은 없으셨던 것 같다.
'사람의 아들'이라고 하셨고,
아버지의 뜻에 따라 일하신다고 하셨습니다.
바리사이들에게 그렇게 보였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왜 그 말이 설득력이 있었을까요...???
그들 자신이 주님의 뜻이라고 하면서 자기 뜻대로 하면서 살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자 그러면,
나는
내 뜻을 주님의 뜻이라 하거나
주님의 뜻을 알면서도 애써 외면하거나
그렇게 살고 있지는 않은지...???
바리사이들이
바로 저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닌지...???
등골이 오싹합니다.
*** 나의 삶의 자리에 접지하기 ***
내가 내뜻이 아니라 그 분의 뜻에 따라 살수 있도록
그 분께로 초점을...
안셀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