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복음 묵상 】3월 8일 사순 제4주간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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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8일 사순 제4주간 토요일 - 요한 7,40-53

그때에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들은 군중 가운데 어떤 이들은, “저분은 참으로 그 예언자시다.” 하고, 어떤 이들은 “저분은 메시아시다.” 하였다.
그러나 이렇게 말하는 이들도 있었다. “메시아가 갈릴래아에서 나올 리가 없지 않은가? 성경에 메시아는 다윗의 후손 가운데에서, 그리고 다윗이 살았던 베들레헴에서 나온다고 하지 않았는가?”

이렇게 군중 가운데에서 예수님 때문에 논란이 일어났다. 그들 가운데 몇몇은 예수님을 잡으려고 하였지만, 그분께 손을 대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성전 경비병들이 돌아오자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이, “왜 그 사람을 끌고 오지 않았느냐?” 하고 그들에게 물었다. “그분처럼 말하는 사람은 지금까지 하나도 없었습니다.” 하고 성전 경비병들이 대답하자, 바리사이들이 그들에게 말하였다.

“너희도 속은 것이 아니냐? 최고 의회 의원들이나 바리사이들 가운데에서 누가 그를 믿더냐? 율법을 모르는 저 군중은 저주받은 자들이다.” 그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전에 예수님을 찾아왔던 니코데모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우리 율법에는 먼저 본인의 말을 들어보고 또 그가 하는 일을 알아보고 난 뒤에야, 그 사람을 심판하게 되어 있지 않습니까?” 그러자 그들이 니코데모에게 대답하였다.

“당신도 갈릴래아 출신이라는 말이오? 성경을 연구해 보시오. 갈릴래아에서는 예언자가 나지 않소.” 그들은 저마다 집으로 돌아갔다. (요한 7,40-53)

<구원의 보증수표>

아무리 생각해도 예수님은 너무나도 감사한 분이십니다. 왜냐하면 그리도 멀리 느껴졌던 하느님의 실체를 손에 잡힐 듯 가까이 느끼게 해주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리도 어려웠던 구원에 이르는 길을 아주 명료하게, 아주 쉽게 가르쳐주셨기 때문입니다.

너무나도 감을 잡기 힘든 하느님의 형상이었습니다. 당대 종교지도자들이 하느님에 대해서 장황하게 설명했었지만, 도무지 느낌이 오지 않던 하느님이셨습니다. 율법학자들이 백성들에게 심혈을 기울여 만든 율법조항들을 구원에 이르는 길로 제시했었는데, 너무나 복잡하고 어려워 평범한 사람들로서 구원은 거의 불가능해보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셔서 구원에 이르는 길을 간결하게, 그러나 명확하게 제시해주셨는데, 사람들은 너무나 쉬워서 웃었습니다. 너무나 간단했던 나머지 ‘그럴 리가’ 하면서 시시하게 생각했고, 끝내 믿지를 못했습니다.

구원의 기준은 단 하나,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정하는가, 아닌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메시아성을 수용하면 구원이요, 그렇지 않으면 멸망이란 것입니다.

예수님의 육화강생을 통해, 꼬일 대로 꼬여 복잡했던 것들의 실타래가 완전히 풀렸습니다. 중구난방이던 해석들이 깔끔히 정리되었습니다. 그 중심에 예수님이 계십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중심, 구원여부의 기준, 구원의 보증수표가 되셨습니다.

그러나 너무 간단하다고 웃을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구세주로 받아들인다는 것, 그래서 구원된다는 것이 단순히 입술로만 가능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말로만 ‘나는 오늘부터 예수님을 구세주로 받아들인다, 그러니 오늘부터 구원이다’가 아니란 것입니다.

예수님을 구세주로 고백한다는 것은 자신의 존재 전체를 건 고백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서 구체적인 삶의 변화, 행동의 변화가 수반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메시아로 고백하기 위해서는 사심으로 가득 찬, 이기적인 욕망으로 가득 찬 우리 마음을 비우는 작업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자기중심적인 마음을 하느님 자비의 마음으로 바꾸는 노력이 요구됩니다.

제 개인적인 체험입니다. 사제생활의 햇수가 쌓여가면서 고해성사, 제일 부담스런 성무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불편한 가운데 오랜 시간 쭈그리고 앉아있는 것도 부담스러웠지만, 자질구레한 남의 세상살이를 계속해서 듣고 않아있는 것이 시간낭비라는 생각도 많이 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자주 짜증이 났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사제로서 고해성사 때 아니면 우리가 언제 보속다운 보속 한번 해보겠냐는 선배신부님의 말씀이 제 가슴을 크게 치더군요.

그 뒤로 고해소에 들어갈 때 마다 습관처럼 마음을 크게 한번 비웁니다. 크게 한번 마음을 바꿔먹습니다. 지금이야말로 사제로서 가장 큰 덕을 쌓는 기회다, 사제로서 유일하게 보속할 수 있는 기회다, 하늘에 보화를 쌓을 수 있는 기회다, 생각하니 마음이 훨씬 편해지더군요.

그 뒤로 고해소는 제 개인적으로 많은 은혜를 체험하는 기쁨의 장소로 변화되었습니다. 세상을 배우는 장소요, 세상 사람들의 고뇌에 작게나마 동참하고, 작게나마 사목자로서 위로의 말을 건넬 수 있는 나눔의 장소로 변화되었습니다.

별것도 아닌 일을 짜증나게 시리 길게 늘어놓던 사람들도 측은해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분들은 다름 아닌 내 형제자매요, 내 부모님, 내 가족이란 생각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마음 한번 바꿔먹기 정말 어려운 일이고, 정말 오랜 시간이 요구되는 일입니다. 그러나 한번 크게 마음 비우면, 제대로 한번 마음 바꿔보면 거기서 오는 은총은 또 얼마나 큰 것인지요.

†살레시오회 수도원 수련원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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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나의 복음 묵상

"이렇게 군중 가운데에서 예수님 때문에 논란이 일어났다."

사람마다 같은 사물이나 상황을 보는 관점이 다를 수 밖에 없어 보입니다.
각자가 살아 온 환경과 체험이 다르고
각자가 추구하는 목표가 다른 때문이겠지요.

또한 선입견이라는 제 눈의 가림막이 순간순간의 판단에 너무나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압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긍적적으로 생각하면 긍적적인 방향으로 일이 진행되는 경험을 많이 합니다.

긍정적인 삶에 대한 책들도 많고
강연도 많습니다.
그만큼 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겠지요...

보는 관점을 바꾸면 세상이 바뀐다는 것을
체험을 통해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꾼다는 것이 생각만큼은 쉽지 않습니다.

*** 나의 삶의 자리에 접지하기 ***
다른 사람이 어떤 사람을 칭찬하면
적극적으로 동조하고

다른 사람이 어떤 사람을 헐뜯거나 비하하면
절대 동조하지 말자.

나의 다른 사람에 대한 긍정적인 체험은
항상 옳다고 생각하고,

나의 다른 사람에 대한 부정적인 체험은
내가 틀릴 수도 있다고 생각하자.

주님 오늘도 제가 좋습니다. 감사합니다.
안셀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