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복음 묵상 】3월 19일 성주간 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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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9일 성주간 수요일 - 마태오26,14-25

그때에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로 유다 이스카리옷이라는 자가 수석 사제들에게 가서, “내가 그분을 여러분에게 넘겨주면 나에게 무엇을 주실 작정입니까?” 하고 물었다. 그들은 은돈 서른 닢을 내주었다.
그때부터 유다는 예수님을 넘길 적당한 기회를 노렸다. 무교절 첫날에 제자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스승님께서 잡수실 파스카 음식을 어디에 차리면 좋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도성 안으로 아무개를 찾아가, ‘선생님께서 ′나의 때가 가까웠으니 내가 너의 집에서 제자들과 함께 파스카 축제를 지내겠다.′ 하십니다.’ 하여라.”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분부하신 대로 파스카 음식을 차렸다.
저녁때가 되자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와 함께 식탁에 앉으셨다. 그들이 음식을 먹고 있을 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 그러자 그들은 몹시 근심하며 저마다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 하고 묻기 시작하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나와 함께 대접에 손을 넣어 빵을 적시는 자, 그자가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 사람의 아들은 자기에 관하여 성경에 기록된 대로 떠나간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사람의 아들을 팔아넘기는 그 사람!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자신에게 더 좋았을 것이다.” 예수님을 팔아넘길 유다가 “스승님, 저는 아니겠지요?” 하고 묻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네가 그렇게 말하였다.” 하고 대답하셨다. (마태 26,14-25)


<유다의 때, 수요일 밤>

“내가 그분을 여러분에게 넘겨주면 나에게 무엇을 주실 작정입니까?”

드디어 때가 왔습니다. 유다 이스카리옷의 때. 최후의 만찬이 거행된 성목요일의 하루 전날인 수요일 밤, 유다는 제자단에서 몰래 빠져나와 수석사제들을 찾아갑니다. 행여 누군가가 볼세라 여우처럼 뒤를 힐끔힐끔 돌아보며 은밀히 원수들과 내통합니다. 예수님의 몸값을 흥정 합니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때에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로 유다 이스카리옷이라는 자가 수석 사제들에게 가서...”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로’라는 표현은 유다의 죄가 얼마나 큰 것인지를 암시하고 있습니다. 유다는 스승 예수님으로부터 각별한 사랑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특별히 12사도 가운데 한명으로 뽑혔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는 유다의 탁월한 수완을 인정하셔서 12사도 가운데서도 중책인 총무 역할까지 맡기셨습니다.

따져보니 유다는 이토록 예수님으로부터 넘치는 사랑을 받고 또 받았습니다. 풍성한 예수님의 은총과 자비 속에 행복한 나날을 보냈습니다.

그런 유다가 스승을 팔아먹고 있습니다. 마치 물건처럼, 종처럼 말입니다. 정말 기가 막힌 배은망덕이 아닐 수 없습니다. 너무나도 태연히 자신의 계획을 말합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유다가 원수들과 가격을 흥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그분을 여러분에게 넘겨주면 나에게 무엇을 주실 작정입니까?”

적대자들은 예수님의 몸값으로 은돈 서른 닢을 유다에게 지불합니다. 유다는 스승이자 만왕의 왕 예수님을 팔아넘긴 대가로 겨우 한명의 노예 몸값을 받았습니다.

은돈 서른 닢을 챙긴 유다의 행동을 보십시오. 너무나도 태연하게 제자단에 합류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한 식탁에 앉습니다. 그리고는 한다는 말, 보십시오.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

배반자 유다를 두고 요즘 독서계에서는 말들이 많습니다. 최근 소개된 ‘유다복음서’에 의하면 유다는 예수님의 요청으로 배반을 했고, 그 배반을 통해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가능하게 되었다. 따라서 유다는 구세사에 일정부분 기여한 사람이라는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만, 이는 수도 없이 많은 가설 및 추측 가운데 하나에 불과합니다.

예수님을 팔아넘긴 당시 배반자 유다의 심리 상황을 정확히 파악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분명한 것 한 가지는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을 당시 유다는 사도로서의 합당한 자격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재정 담당은 아무에게나 맡기는 것이 아닐 텐데, 예수님께서는 유다에게 그 책임을 맡겼습니다. 그만큼 신뢰가 가는 인물이었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유다는 다른 사도들과 함께 전도여행에 파견되었고, 예수님으로부터 능력을 부여받고 치유와 구마활동도 행하였습니다.

그러던 유다가 왜 배반을 하게 되었을까요?

복음서에 따르면 이렇습니다. 유다는 세월과 더불어 그 순수하고 좋았던 첫 마음을 잃어버렸습니다. 제자단의 모든 경제를 책임지던 유다였습니다. 때로 막대한 금액의 기부금도 만질 수 있었습니다. 사람들로부터 특별대우에도 자기도 모르게 길들여졌습니다. 유다의 몸과 마음은 조금씩 예수님이 아니라 돈에로 기울어져만 갔습니다.

이미 돈맛을 알아버린 유다였습니다. 물질의 노예가 되어버린 유다였기에 스승마저도 팔아치웁니다. 스승을 팔아넘기기 위해 스승에게 입맞춤할 정도가지 파렴치한 인간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유다가 얼마나 불쌍했던지 예로니모 성인의 이렇게 외쳤답니다.

“아, 불행한 유다여! 아, 불쌍한 유다여!”

예수님의 일을 하는 우리 교회 구성원들 역시 정신 바짝 차리지 않으면 큰 일 납니다. 사랑의 실천이나, 복음 선포는 뒷전인 채 돈만 밝히기 시작할 때, 물질만능주의에 젖어들기 시작할 때 우리 인생 역시 유다처럼 불쌍하게 되고 말 것입니다. 투명성을 상실할 때, 달콤한 금전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할 때 우리 역시 유다처럼 불행하게 될 것입니다.

†살레시오회 수도원 수련원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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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유다..

이 대목은 참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주는 것 같습니다. 평소 존경했던 사람(특히 정치인)이 갑자기 실망스런 결정과 행동을 하면 유다가 자연스레 떠오릅니다. 속으로 욕도 해봅니다. "아~ 이 유다스러운" 라고요.. ^^;

호기심이 많은 성격이라 유다를 이해해보려고 '유다의 복음서'도 읽어봤지만, 내용도 좀 난해하고 공감하지는 못하는 내용이었습니다. 잘은 모르겠지만 영지주의적 영향을 받은 문서라 그런지..

근데 위 글을 읽으면서 쉽게 이해가 갑니다. 사람은 시간이 흐르면서 변합니다. 좋은 모습으로 혹은 안좋은 모습으로,, 또 다시 역으로.. 사람들 관계도 그렇다고 봅니다. 어떨때는 좋았다가 어떨때는 안좋았다가.. 유다도 그런 변수가 많은 모습을 지닌 인간이었구나..

가끔 친구와 소주를 마실 일이 있으면, '처음처럼'을 시키곤합니다. 특별히 그 소주가 맛이 있어서가 아니라, 순전히 술제목 때문입니다. 대화하다 좀 안좋아지려고 하면, 술명에 씌여진 글을 들여봅니다. 처음에 친구와 만났던 그때의 좋은 기분을 유지하기 위해서지요. 누구나 '초심'은 대개 순수하고 맑습니다. 문제는 그 초심을 유지하고 잘 발전시켜야 성공한 인생을 살았다고 볼 수 있는데,, 각종 유혹때문에 쉽지 않으니, 그게 문제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내 힘으로 안되면, 의탁할 주님이 계시니까 이제는 힘들지 않습니다. 유혹에 빠져 혼란스러워하는 나를 '초심'을 잃지않고, 살아갈 수 있게 해주실 든든한 '백'이 있으니까요. ^^;

초심...

정말 좋지요...
저는 처음처럼 살기가 쉽지 않아
참이슬을 주로 마십니다.
그래도 세일해서 값이 싸면 처음처럼도 가끔...

혼란스러울 때
말씀을 묵상하면서
초심으로 돌아가곤 합니다.

주님과 함께 하는 좋은 하루...
안셀모

참이슬은..

초기 광고모델 이영애씨가 자꾸 떠올라
혼란스러워 싫습니다. ㅎㅎ

야그가 삼천포로 빠지네요. ^^;

같은 주님...

이야기 아닌가요...???
야단 맞을라...*^^*

안셀모

나의 복음 묵상

“스승님, 저는 아니겠지요?”

살아 오면서 가장 믿었던
그래서 가장 많은 정을(사랑을) 주었던
사람으로부터 배신 당했을 때가
가장 힘들었던 때였던 것 같습니다.

그것도 안 부대끼면서 살수 있으면 좋을텐데...
먹고 살자니 안 볼 수도 없으니 더욱 남감했습니다.

이제야 많은 것 접고
그저 평범한 다른 사람 대하듯 할 정도가 되었으니
그래도 주님 앞에서 "그래도 애는 썼습니다."라고 할 정도는 되니
다행이다 싶습니다.

예수님께서 배신을 마음 먹은 유다에게 독설을 쏟아내기 까지 하면서
당신 사랑으로 마지막까지 회개를 촉구합니다.
그러나 대답은

“스승님, 저는 아니겠지요?”

인간이 욕심에 눈이 가려지면 보이는 것이 없나 봅니다.
“스승님, 저는 아니겠지요?”
이 말이 제 말이 아니길...
그러나
.
.
.

*** 나의 삶의 자리에 접지하기 ***
나는 누구를 배반하고 있지 않은 지 나 가까이에서부터 살펴보는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다. 아멘.

안셀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