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복음 묵상 】9월 28일 연중 제26주일…조원행 야고보 신부님

카테고리:


9월 28일 연중 제26주일 - 마태오 21,28-32

?

그때에 예수님께서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어떤 사람에게 아들이 둘 있었는데, 맏아들에게 가서 ‘얘야, 너 오늘 포도밭에 가서 일하여라.’ 하고 일렀다. 그는 ‘싫습니다.’ 하고 대답하였지만, 나중에 생각을 바꾸어 일하러 갔다. 아버지는 또 다른 아들에게 가서 같은 말을 하였다. 그는 ‘가겠습니다, 아버지!’ 하고 대답하였지만 가지는 않았다. 이 둘 가운데 누가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였느냐?” 그들이 “맏아들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간다. 사실 요한이 너희에게 와서 의로운 길을 가르칠 때, 너희는 그를 믿지 않았지만 세리와 창녀들은 그를 믿었다. 너희는 그것을 보고도 생각을 바꾸지 않고 끝내 그를 믿지 않았다.” (마태 21,28-32)


<나중에 생각을 바꾸어 일하러 갔다.>

오늘 복음에는 언뜻 루카 15장에 나오는 저 유명한 ‘되찾은 아들의 비유’를 연상케 하는 두 아들의 비유가 나오고 있습니다. 루카복음에서 둘째 아들이 회개하여 아버지께로 돌아왔듯이 처음에는 본성에 따라 싫다고 했지만 회개하여 일하러 간 맏이, 반대로 말로는 너무나 자신 있게 “가겠습니다, 아버지”했지만 마음으로도 실제로도 전혀 가지 않은 다른 아들, 이들의 비유는 이어지는 비유 적용 말씀에서 처음에는 공적인 죄인이었지만 먼저 하느님 나라로 들어가는 세리와 창녀, 반대로 비록 겉으로는 가장 지극한 종교인이었지만 생각을 바꾸어 믿지 못한 사제들과 원로들에 대한 폭로로 발전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런 선포는 당시 종교적•사회적 상식을 송두리째 뒤엎는 폭탄선언이었습니다. 나라와 민족을 팔아먹는 직업상의 죄인인 세리, 윤리적인 죄인인 창녀, 그들은 유대 사회 안에서 누구나 인정하는 공적인 죄인이었습니다. 반면 종교적인 삶을 위해 거친 서민과 거리를 두고 살 정도의 바리사이파, 하느님의 법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율법학자, 제사를 주관하는 사제 그리고 백성의 원로들은 그 누구도 범치 못할 종교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런 사회구조 안에서 예수님은 죄인과 의인의 순서가 거꾸로 바뀔 것이라 선언하셨던 것이었습니다.

이런 삶의 역전은 우리 삶속에서도 끊임없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본성적으로 자기 욕심에 따라 살고 싶은 욕구, 우선 말로만이라도 현실을 모면해보고자 하는 짧은 술수, 그러다가도 가끔씩은 삶의 진실을 탐구해보기도 하는 것이 우리의 삶들입니다. 그러함에도 주님께서 항상 중요시하는 것은 현재입니다. 과거에 얼마나 잘살았고, 못살았고 하는 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극악하고 공적인 죄인이라 하더라도 회개하여 지금 깨끗하다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갑니다. 바로 여기에 삶의 희망이 있고, 의욕이 있습니다.

나중에 생각을 바꾸어 일하러 간 맏이는 우리의 표본이 되고 우리의 희망이 됩니다. 물론 생각을 바꿔 회개한 나중이란, 바로 지금 이 순간을 이야기하고 계심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나중은 언제든 되풀이되고 새롭게 될 수 있다는 면에서, 하느님의 무한한 인내와 넓으신 자비에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금 회개하며 하느님의 일터로 나아갑시다.

▣ 의정부교구 적성본당 주임 조원행 야고보 신부

?

첨부파일크기
img_2750962_1367601_0.jpg33.3 KB

댓글

오늘은 어쩐 일인지 양승국 신부님 묵상글 대신...

조원행 야고보 신부님 묵상글 올라 왔네요...
주님과 함께하는 은혜로운 주일...
안셀모

나의 복음 묵상

"아버지의 뜻"

남 탓할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제 자신이 아직도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어디에 '하느님의 뜻'이 있는지를 가늠하지를 못하는데...

*** 나의 삶의 자리에 접지하기 ***
먼저 하느님의 뜻부터 찾자.
그래야 내 삶 속에 녹일 것이 아닌가?
안셀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