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복음 묵상 】3월 9일 사순 제 2주간 월요일…양승국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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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9일 사순 제 2주간 월요일 - 루카 6,3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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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심판받지 않을 것이다. 남을 단죄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단죄받지 않을 것이다.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 너희 품에 담아 주실 것이다.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되받을 것이다.” (루카 6,36-38)


<머릿속이 환해지는 영화>

형제들과 가끔씩 ‘머릿속이 환해지는’ 영화를 한편씩 보고 있습니다. 물론 수도자답게 수도원 시청각실에서, 비디오를 빌려서 봅니다. 교육자로 살아가는데 도움을 주는 영화, 폭력이나 선정성이 없는 영화, 그래서 다시금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교훈을 주는 좋은 영화를 골라야하니 그것도 보통 일이 아니더군요. 주로 이런 영화를 보지요. ‘여선생 VS 여제자’ ‘선생 김봉두’ ‘내 마음의 풍금’ 등등.

‘12세 관람가’의 영화, ‘야한 장면이 하나도 없는’ 영화, ‘단 한명도 죽지 않는 영화’들이기에 밋밋할 수도 있겠지만, 조폭들의 무가치한 일상을 영웅적으로 그린, 그래서 우리 청소년들을 자기도 모르게 폭력성에로 몰고 가는 ‘일생에 도움이 안 되는’ 무가치한 영화들보다는 백배 더 낫습니다.

오늘은 ‘패왕별희’의 감독으로 유명해진 첸 카이커 감독이 제작한 ‘투게더’란 영화를 보았습니다. 정말 제대로 골랐더군요. 시종일관 진한 감동의 연속이었습니다. 참부모란, 참스승이란 이런 모습이로구나, 하는 것을 잘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우스꽝스런 모습의 아버지 리우청의 모습이 계속 제 머릿속에 남아있습니다. 시장에서 일하는 아버지, 어색한 구식양복, 어울리지 않는 원색 와이셔츠에, 전혀 아닌 빨간 모자를 쓴 아버지, 아들 입장에서 보면 조금은 창피한 ‘촌뜨기’ 아버지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그 아버지는 자신을 위해서는 단 한 푼도 쓰지 않는 아버지지만, 아들을 위해서라면 목숨까지도 바칩니다. 어릴 적부터 바이올린 신동이란 말을 듣고 자란 아들 ‘샤오천’의 장밋빛 미래를 위해 아버지는 그야말로 ‘전력투구’합니다. 아들이 훌륭한 교수의 가르침을 받도록 하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합니다. 아들의 성공적인 미래를 위해서라면 자신은 바보가 되어도 좋은 아버지입니다. 아들에게 입히기 위해 직접 뜨개질을 하는 아버지입니다. 아들의 오디션에 조금이라도 방해가 될까봐 공연장에조차 나가지 않는 아버지입니다. 결국 아들의 성공을 위해 아들을 떠나가는 아버지입니다.

중요한 무대를 앞둔 어느 날, 지도교수는 바이올린 연주가 잘 안 된다는 소년에게 “네 연주에는 감사하는 마음이 부족하다”고 지적합니다. 그리고 아버지가 처음 자신을 찾아왔을 때, ‘꼭 제자로 삼아 달라’고 신신당부하면서 밝힌 소년의 출생내력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어느 추운 겨울, 북경역을 지나던 아버지 리우청은 바이올린과 함께 한쪽 구석에 누워있던 갓난아기 샤오천을 발견합니다. 착해빠진 아버지는 추위와 배고픔에 자지러질듯 울어대는 아기를 외면할 수 없었습니다. 결국 하늘이 준 인연으로 여기고 아들로 받아들입니다.

추위와 굶주림에 얼어 죽어가던 아기, 생모로부터 버림받은 아기, 세상 사람들의 무관심 속에 북경 역에 누워있던 아기를 끌어안고, 그 아기의 미래를 위해 자신의 삶은 완전히 포기하는 아버지 리우청의 모습에서 저는 하느님 자비의 한 자락을 느꼈습니다.

우리가 한 평생 신앙생활을 해나가는 과정에서 ‘반드시 이뤄내야 할 과제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하느님 자비가 얼마나 큰 것인지를 파악하는 일’입니다.

우리가 언젠가 흘러넘치는 하느님의 자비,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그분의 인내, 풍요로운 그분의 사랑을 조금이나마 깨닫게 된다면, 우리는 절대로 가만히 있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너무나 기뻐서 펄쩍 펄쩍 뛸 것입니다. 너무나 감격해서 눈물 흘릴 것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느님 아버지의 극진한 사랑을 알게 되는 순간, 고난 속에서도 우리는 찬미와 감사의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다른 무엇에 앞서 하느님의 자비를 조금이라도 맛볼 수 있는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왜냐하면 그분 자비를 맛보기 전까지 우리 삶은 큰 변화가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크신 자비를 깨닫는 순간 우리 삶은 변화가 시작됩니다. 우리의 내면에는 충만한 평화가 찾아올 것입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알게 되는 그 순간부터 이웃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도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 크신 하느님 자비의 시선으로 이웃을 바라보면 다들 그저 불쌍한 존재, 측은한 존재, 도움의 손길을 내밀 수밖에 없는 사랑스런 존재일 뿐입니다.

†살레시오회 수도원 수련원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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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복음 묵상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되받을 것이다.”

한달 동안을 분노와 미움의 찌꺼기를 제 마음으로부터 떨쳐내느라
제가 다른 사람에게 주었던 상처들은 돌아보지를 못했습니다.
조직보호라는 명분으로 저를 통하여 받았을 커더란 아픔들을 가슴에 새깁니다.

*** 나의 삶의 자리에 접지하기 ***
보속하는 마음으로 하루를 ...
안셀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