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복음 묵상 】1월 21일 월요일 성녀 아녜스 동정 순교자 기념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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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21일 월요일 성녀 아녜스 동정 순교자 기념일 -마르코 2장 18-22절

그때에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들이 단식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예수님께 와서,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의 제자들은 단식하는데, 선생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단식할 수야 없지 않으냐? 신랑이 함께 있는 동안에는 단식할 수 없다.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때에는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아무도 새 천 조각을 헌 옷에 대고 깁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헌 옷에 기워 댄 새 헝겊에 그 옷이 땅겨 더 심하게 찢어진다. 또한 아무도 새 포도주를 헌 가죽 부대에 담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도 부대도 버리게 된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마르 2,18-¬22)

<새벽미사란 잔치, 오늘 하루란 잔치>

단식 한번 해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언젠가 위장계통에 문제가 생겼을 때, ‘단식이 최고’라는 누군가의 감언이설에 넘어갔습니다. 몸에 문제가 생기면 먼저 병원으로 가서 검진을 받았어야 했는데, 워낙 귀가 얇다보니 ‘단식이 최고’라는 말을 흘려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단식, 그냥 시작하면 되는 것이 아니더군요. 나름대로 절차가 있었습니다. 초보자들을 위한 주의사항도 엄청 많았습니다. 교육도 필요했습니다. 준비해야 할 것도 꽤 많았습니다. ‘오늘부터 단식이다’ 하고 바로 단식을 시작하지 않았습니다. 무척이나 까다로운 과정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일단 시작을 했었는데, 과정이 진행될수록 너무나도 괴로웠습니다. 결국 자기와의 싸움이더군요. 사흘까지는 이를 악물고 견뎌냈었는데, 사흘이 고비더군요. 사흘이 지나면서 이런 생각이 제 머릿속에 자리 잡기 시작하더니 그것으로 끝이었습니다.

“이렇게까지 해서 도대체 무슨 부귀영화를 누려 보겠다는 거지? 내 주제에 단식은 무슨 얼어 죽을 놈의 단식. 그냥 이대로 그냥 살지 뭐. 아프면 아픈 대로. 그러다 안 되면 죽지. 안 그래?”

그 뒤로 단식기도 자주 하시는 분들, 정말 우러러보이더군요. 단식, 그것 정말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보통 독한 사람 아니면 힘든 것입니다. 웬만한 의지력이 아니면 정말 해낼 수 없는 일입니다.

마태오 복음 4장 2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단식하시는 광경이 묘사되고 있습니다. 하루 이틀이 아닙니다. 일주일 열흘도 아닙니다. 장장 40일간 단식을 하셨습니다. 인간 육체의 한계를 체험하신 단식, 목숨을 건 단식이었을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도 자주 단식 하셨습니다. 고민거리가 생길 때, 정말 괴로울 때, 하느님의 뜻을 찾고 싶을 때, 예수님께서는 자주 광야로 가셨습니다. 단식 가운데 기도하셨습니다. 어쩌면 예수님은 단식의 전문가였을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 단식은 꽤 일상적인 그 무엇이었습니다. 자연스런 것이었습니다. 레위기 16장 29절에 의하면 유대인들은 일 년에 하루를 속죄의 날(10월 1일)로 정해 의무적으로 단식했습니다.

또 기근이나 전쟁, 가뭄, 대형 참사와도 같은 천재지변을 겪을 때, 이웃들의 고통에 대한 동참의 표현으로 단식일을 선포했습니다. 한 술 더 떠서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일주일에 두 번씩 단식을 했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도 단식하면 이력이 난 사람들이었는데, 그것은 아마도 스승의 엄격한 생활의 영향을 받았을 것입니다.

단식의 전문가였던 바리사이파 사람들, 그리고 예수님, 이 둘 사이의 차이점은 무엇이겠습니까?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단식은 정말 눈을 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위선적인 것이었습니다. 지금 자신들이 단식하고 있다는 것을 어떻게 해서든 다른 사람이 알아주기를 바랐습니다. 내가 지금 단식하느라 이렇게 괴롭다, 이렇게 힘이 없다는 것을 다른 사람들이 인정해주기를 원했습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일단 죽겠다는 표정을 지었습니다. 뭘 물어봐도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겨우 겨우 대답했습니다. 더욱 가관인 것은 자신이 지금 단식하고 있다는 것을 공공연하게 떠들어댔습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그런 꼴을 보고 계셨던 예수님께서는 정말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 연유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단식하는 것을 남에게 드러내지 말라.”

가족 가운데 누군가가 먼저 세상을 떠나면 가슴은 비통함으로 찢어집니다. 눈물이 저절로 흘러내립니다. 그런 상황에서 삼시세끼 챙겨먹기란 정말 힘든 일입니다. 그토록 사랑했던 사람이 먼저 세상을 떠났기에, 이제 더 이상 그의 자취를 찾아볼 수 없기에, 슬픔이 밀물처럼 밀려듭니다. 안타까움에 할 말을 잃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편안하게 밥을 먹겠습니까?

이처럼 단식은 슬픔의 표현입니다. 애통함의 표현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예수님께 따집니다. 다들 단식하고 있는데 선생님의 제자들은 어찌 저리도 게걸스럽게 잘들 먹느냐고 대놓고 따집니다.

하수들의 차원 낮은 질문 앞에 고수이신 예수님께서는 약간은 애매모호한 표현, 알쏭달쏭한 표현, 그러나 심오한 표현, 신앙의 진리와 핵심이 담긴 차원 높은 답변을 펼치십니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단식할 수야 없지 않느냐?”

당장 자신들의 눈앞에 펼쳐지는 현실에만 혈안이 되어있던 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 이 말씀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말씀을 통해 자신의 메시아성을 넌지시 밝히십니다.

예수님의 육화강생과 더불어 그분의 활동무대가 시작됨으로 인해 이제 구약 시대는 마감된 것입니다. 새로운 시대, 새로운 세상이 온 것입니다.

그간 메시아 오심을 기다리며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그렇게 자주, 그렇게 오랫동안, 그렇게 목숨 바쳐 해오던 단식도 이제는 그칠 때인 것입니다.

이제 그들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과제는 이 땅에 오신 메시아께 감사드리고, 그분의 가르침에 귀 기울이는 일입니다. 그분께서 초대하신 잔치에 기쁜 마음으로 참석하는 일입니다. 그분께서 내어주시는 의자에 앉아 행복한 마음으로 잔치를 즐기는 일입니다.

결혼식이나 고희연과도 같은 흥겨운 잔치 주최한 주인에게 있어서 가장 큰 보람은 하객들이 기쁜 마음으로 와주는 일입니다. 차린 음식을 맛있게 먹어주는 일입니다. 준비된 여흥에 기꺼이 동참하며 열심히 놀아주는 일입니다.

사흘 밤낮을 두고 준비한 음식 앞에서 열심히 먹어주면 얼마나 좋습니까? 잔치에 온 누군가가 ‘아, 나 지금 단식기도 중이야’ 라면서 물 잔만 들고 있다면, 주인 입장에서 김이 팍 셀 것입니다.

잔치에 온 사람들이 다들 어두운 표정으로 앉아있다든지, 다들 인상을 구기고 있다면 잔치 주인으로서는 정말 괴로운 노릇일 것입니다.

오늘 또 다시 우리 앞에 ‘새벽미사’란 잔치, ‘오늘 하루’란 귀한 잔치가 펼쳐질 것입니다. 감사하면서, 행복해하면서 기쁜 얼굴로 잔치를 만끽하는 하루가 되길 바랍니다.

†살레시오회 수도원 수련원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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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예수님은 역시..

꽉막힌 룰보다는 인간들이 처한 상황을 먼저 고려하신 자비로우신 분이십니다.

근데..

전 포도주(술) 자루가 골프채 아이언 카버로 보이고..
저 아래 나비들은 너무 촐삭거리고...

음.. 분심이 든다.. ㅎㅎ (허나 멋있네요.)

한번 더 읽어보겠습니다.

촐삭거리는 나비 없앨까요?

예전에 받아 놓았던 나비가 보이기에,
...원래 제가 나비를 좋아하거던요...
올렸는데
촐삭거리더라구요...
그래서 없애 버릴까 하다가 그냥 두었는데...
없애 버릴까요?

안셀모

아녀 그냥 두세요..

벌써 친해졌구만요..ㅎㅎ

나의 복음 묵상

주님께서 매일매일 잔치에 초대하십니다.
매일매일 미사를 통하여 초대하십니다.
미사로 시작하는 하루,
잔치로 시작하는 하루,
기쁘고 즐거운 하루입니다.

매일 미사로 하루를 시작하게 이끌어 주시는 주님,
감사합니다.

안셀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