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복음 묵상 】3월 17일 성주간 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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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7일 성주간 월요일 - 요한 12,1-11

예수님께서는 파스카 축제 엿새 전에 베타니아로 가셨다.
그곳에는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일으키신 라자로가 살고 있었다. 거기에서 예수님을 위한 잔치가 베풀어졌는데, 마르타는 시중을 들고 라자로는 예수님과 더불어 식탁에 앉은 이들 가운데 끼어 있었다. 그런데 마리아가 비싼 순 나르드 향유 한 리트라를 가져와서,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그 발을 닦아드렸다. 그러자 온 집안에 향유 냄새가 가득하였다. 제자들 가운데 하나로서 나중에 예수님을 팔아넘길 유다 이스카리옷이 말하였다. “어찌하여 저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지 않는가?” 그가 이렇게 말한 것은, 가난한 이들에게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도둑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돈주머니를 맡고 있으면서 거기에 든 돈을 가로채곤 하였다.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이 여자를 그냥 놔두어라. 그리하여 내 장례 날을 위하여 이 기름을 간직하게 하여라. 사실 가난한 이들은 늘 너희 곁에 있지만, 나는 늘 너희 곁에 있지는 않을 것이다.” 예수님께서 그곳에 계시다는 것을 알고 많은 유다인들의 무리가 몰려왔다. 예수님 때문만이 아니라, 그분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일으키신 라자로도 보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수석 사제들은 라자로도 죽이기로 결의하였다. 라자로 때문에 많은 유다인이 떨어져 나가 예수님을 믿었기 때문이다. (요한 12,1-11)

<사순절의 기쁨>

“이 여자를 그냥 놔두어라. 그리하여 내 장례 날을 위하여 이 기름을 간직하게 하여라.”

성주간을 시작하며 수난 당하시는 예수님의 얼굴을 묘사한 그림 몇 장을 책상위에 쭉 늘어놓고 그분의 수난 여정을 한번 묵상해보았습니다.

보통 십자가 상 예수님의 얼굴을 표현할 때 화가나 작가들은 고통스런 예수님의 얼굴을 묘사하더군요.

그런데 특별한 그림 한 장이 있었습니다. 얼굴은 온통 피땀으로 얼룩진 얼굴이며, 가시관에 짓눌린 얼굴이었지만, 가만히 바라보니 고통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얼굴입니다. 고통스럽기보다는 오히려 만족스런 얼굴이었습니다. 오히려 희미한 미소조차 짓고 계셨습니다.

이 특별한 수난 예수님의 얼굴이 과연 무엇을 의미 하는가 생각해봤습니다.

수난 중에도 미소 짓고 계시는 예수님의 얼굴은 우리 하느님의 본질을 잘 드러내고 있는 표현이 아닐까요?

이제 내 한 몸 희생해서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다 이루었다는 의미의 흡족한 얼굴이 아닐까요?

당신이 그토록 염원해온 대로 당신 한 몸 제물로 바쳐 우리 모두를 구원하게 되었다는 보람에서, 충족감에서 미소 짓고 계시는 것이 아닐까요?

나는 비록 이렇게 고통스럽고, 또 이제 곧 죽겠지만, 대신 너희들은 나 때문에 살겠구나, 내 십자가로 인해 구원받게 되었구나, 하느님 아버지의 구원역사가 이제 나로 인해 완료되었구나, 하는 마음에 미소 짓고 계신 것이 아닐까요?

우리의 하느님은 바로 이런 분이심을 확신합니다.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시면서도 우리를 걱정하시는 분, 우리를 격려하시는 분, 우리 마음의 평화를 바라시는 분, 우리의 구원을 원하시는 분, 우리의 행복을 바라시는 그런 분 말입니다.

사순절은 어떻게 보면 기쁨과 은총의 절기입니다. 사순절은 마지못해, 억지로 우리에게 부과된 의무를 수행하는 괴로운 나날이 아니라 한없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얼굴을 확인하였기에 행복한 날들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소중히 여기시는지, 우리를 얼마나 끔찍이 챙기시는지를 알았기에 기쁜 마음으로 우리도 그분을 닮아나가려고 노력하는 때입니다.

예수님의 수난, 그 최종 종착지인 골고타 언덕, 거기 세워진 십자가는 역설적이게도 우리에게 가장 큰 은총의 선물입니다.

십자가형에 처해진 예수님께서는 그 끔찍한 상황 가운데서도 사목활동을 하십니다. 극악무도한 한 인간을 구원으로 초대함을 통해 세상 모든 죄인들에게 희망을 주십니다.

자기 한 몸 추스르기도 힘든 난감한 상황 한 가운데서도 개념 없는 우리 죄인들을 용서해주시기를 하느님 아버지께 청하셨습니다.

이처럼 십자가 위에서도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에게 마지막까지 기회를 주시는 예수님, 마지막까지 인내하시고, 용서하시며, 마침내 구원을 주시는 예수님께서 오늘 이 아침 우리에게 숙제 몇 가지를 내어주시는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한 번 일어서기.

정말 마음에 내키지 않지만 크게 한걸음 물러서기.

죽기보다 힘들지만 예수님 생각하며 용서하기.

†살레시오회 수도원 수련원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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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복음 묵상

“나는 늘 너희 곁에 있지는 않을 것이다.”

항상 저의 곁에 있을 것만 같았던 부모님...
네 분중 이제 어머니 한 분만 계십니다.
늘 계셨으면 하는 바램입니다만...
그것은 주님의 몫임을 잘 압니다.

그래도 늘 함께 계셨으면 좋겠습니다.

*** 나의 삶의 자리에 접지하기 ***
오늘 어머니께 전화드려야겠습니다.

안셀모